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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법 불신만 키운 14개월의 ‘판사 블랙리스트’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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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사법부 내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25일 발표된 조사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일부 판사의 성향을 평가한 문서는 있지만, 그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이 부여됐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이다. 둘째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관심 사안과 관련된 재판에 법원행정처가 ‘협조’ 의사를 밝히며 상고법원 설치에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결 내용 때문에 법관 징계를 검토했다는 내용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의 필요조건으로 명단에 오른 판사에 대한 인사적 불이익을 거론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블랙리스트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1년2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 조사(진상조사, 재조사, 추가조사)의 결말이다. 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통상임금 분쟁 등의 재판과 관련해 청와대에 ‘협조 노력 또는 공감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기록된 문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실제로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물증은 찾지 못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유화적 제스처를 보인 것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셋째 사안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긴급조치에 의한 피해 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을 한 판사에 대한 것인데, 대법원 판례를 따르지 않는 하급심 문제는 대법원이 안고 있는 오래된 고민거리다.

지난해 3월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진 뒤 일부 판사들은 법원 내부에 엄청난 ‘적폐 세력’이 있는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런데 조사 결과는 이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다소 무리한 일들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재판 농단’과 같은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재판 불복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