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개헌론할 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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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여곡절끝에 여야합의개헌을 이룩한지 1년도 못돼 또다시 개헌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헌정 1년에 8차례 개헌도 모자라 개헌 1년이 채 안돼 개헌론이 또 나와야할 정도로 우리정치는 단견이란 말인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제도가 정치의 발전을 막는다면 여덟번이 아니라 아홉번, 열번이고 고쳐야할 것이다. 필요하면 개헌도 해야한다는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개헌론을 제기하기에 앞서 현행제도가 우리 정치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충분한 검증을 했느냐는 점이다.
글씨 못쓰는 사람이 붓만 탓한다고 정치력부족을 제도 탓으로 돌리는 꼴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얘기다.
현행 직선대통령제가 선거과정과 그후에 숱한 문제점을 드러낸건 사실이지만 버려야할 제도로 결론이 나기는 이르라고 이론적으로 여소야대의 상황을 보다 원활하게 꾸려가는데는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할지 모르나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정치풍토에서 내각제인들 과연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왕이면 모처럼의 합의개헌을 통해 마련한 현행 대통령제가 잘 굴러가도록 애써 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볼 만큼 해봤는대도 도저히 문제가 많다고 판단될 때 개헌론이 나와도 나와야지, 제대로 운영도 해보기 전에 제도를 고치자고 해서는 폭넓은 공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의 내각제 개헌론처럼 국민들에게 느닷없다는 느낌을 주게 되면 오히려 의구심과 반감만 확산시킬가능성이 크다.
원래 의원내각제는 민주적 제도라는 면에서 직선 대통령제만 못지 않은게 사실이다. 영국·서독·스웨덴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민주국가와 일본이 이 의원내각제로 민주정치를 꽃피웠다. 세계 각국의 실적으로는 의원내각제가 오히려 대통령제보다 민주정치의 실적을 더 쌓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제2공화국의 짧은 내각제 실함이 5· 16군사쿠데타로 좌절을 맛보았다. 거기에다 유신이후 내 손으로 대통령 뽑을 기회가 박탈된데서 비롯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보겠다는 국민적 열망이 직선 대통령제 요구로 분출됐다. 그러한 열망 앞에 선진각국의 예나 이론 또는 예상되는 직선제의 피해에 대한 경고는 설자리가 없었다.,
노 대통령이 6·29선언에서 밝혔듯이 의원내각제가 될 민주적이거나 보다 못한 제도여서가 아니라 다수 국민이 직선대통령제를 원하기 때문에 대통령제로 가게 된 것이다.
그 선언 후 작년 8월 중앙일보가 조사한 바로는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의견이 54·6%로 의원내각제지지(24· 3%) 의 두배가 넘었다.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국민적 한이 어느 정도 풀렸고 선거과정과 결과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난 지역감정 등의 폐해를 실감한 만큼 국민의 직선제 열망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직선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의 선호는 내각제에 비해 훨씬 커 보인다.
이렇게 거의 맹목적이다 싶은 대통령제 선호도 지역에 바탕을 둔 4당 정립세와 여소야대의 상황이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운 정계구조에선 점차 잠식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의 특별한 애착이 희석될 때라야 비로소 의원내각제는 대체 가능한 제도로 객관적인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기가 성숙되지 못 한게 분명하다. 직선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적 애착이 아직은 뿌리 깊고,따라서 야당 지도자들이 두 제도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비교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개헌론을 제기하면 야당간 선명경쟁 때문에라도 야당지도자들의 운신 폭을 줄여 그들을 반대 쪽으로 묶어 놓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지난번 개헌 때도 그랬다. 야당 의원 가운데 내각제선호자가 상당수 있었지만 국민의 직선제선호 분위기와 야당권내 선명경쟁, 그리고 내각제추진세력의 ,좋지 못한 이미지와 정치역량 미숙 등으로 세력화에 실패하고 말지 않았는가.
최근의 내각제 개헌론도 제3야당총재의 경우는 선거때부터 했던 소리이고 당의 비중도 별로 크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 치자.
그러나 집권당대표의 내각제개헌주장은 설혹 그것이 그의 오랜 지론이라해도 집권당이란 위치 때문에 정국에 미치는 충격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다른 야당들로서도 그냥 넘겨 버리기가 어렵다.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응하게 되면 국민의 직선제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남아있는 지금으로서는 반대쪽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야당목이 좀더 객관적으로 두 제도를 보고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버리는 꼴이된 셈이다.
이는 내각제추진세력에게 전술적으로 이롭지 못할뿐더러, 국가적 차원에서도 국가기본문제에 관한 정치세력들의 선택 폭을 미리 좁혀 버린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게 지금은 어느 모로 봐도 개헌론이 제기될 시기가 아니다. 우선 나라의 민주화와 당면 난제들을 현행 대통령제의 틀 속에서 풀어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때다.
그런 노력끝에 정치발전이 이룩되면 현행제도도 좋은 것이고, 혹시 도저히 헤쳐 나가기가 어렵다는 공감대가 넓어지면 그때 가서 개헌론이 나와도 나오는게 자연스럽다.
따라서 설익은 내각제 개헌론은 지금 당장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겠다. 마찬가지로 내각제개헌은 앞으로도 절대 반대라고 미리부터 스스로를 제약하는 것도 삼가는게 좋을 듯 싶다. <편집국장대리> 【성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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