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내각제 개헌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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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각책임제로의 대전환을 검토할 때가 왔다』는 민정당 윤길중 대표위원의 마닐라발언이 정가에 충격적인 강진을 몰고왔다.
필리핀을 공식방문중인 윤대표는 내각제개헌을 내년3월로 계획하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를 전후해 가시화될 것이라고까지 말해 내각제개헌에 대한 구상이 여권내에 구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윤대표의 발언은 김종필 공화당총재가 미국LA에서 『이제 내각제개헌을 검토할 때가 왔다』는 발언과 타이밍상으로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동안 잠복돼 있던 내각제 개헌추진의사들이 바야흐로 수면위로 떠오르는 느낌이다. 윤대표의 발언에 대해 민정당측은 즉각 그의 사견이며 당 방침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박준병 사무총장은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고 했고 윤대표의 발언에 대처하는 당의 곤혹스런 모습에서 약간은 돌발성을 띤 것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윤대표의 발언이 즉흥적인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의 발언은 다분히 계산된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처음부터 해외에 나가 터뜨릴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문제는 그의 발언이 어느정도 당의 내부방침과 직접 연결되어 있느냐는 점이다. 원래내각제개헌 옹호론자인 윤대표가 해외에서 보다 자유스럽고 책임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 나름의 정국타개 수단으로 내각제를 띄워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윤대표가 당의 활로를 열기 위해 당내 민주화문제 등 『뭔가를 곧 터뜨리겠다』고 외부적으로 말해왔던 점, 그리고 중간평가 등에 대해 당이 그동안 검토해 왔던 여러가지 대안들을 엮어 보면 이번 발언은 잘 짜여진 각본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즉 88후 정국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내각책임제를 상정해온 민정당으로서는 JP의 내각제발언에 잇따라 윤대표의 해외발언으로 내각제를 「공식화」시키펴고 계획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JP가 민정당과 연계되어 있을 공산은 물론 크지 않다.
그러나 JP발언을 기화로 윤대표가 바깥에서 사견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민정당은 그것이 당 방침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이에 이미 내뱉은 「내각책임제개헌」은 하나의 현실로 굳어지고 구체화되어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윤대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나름대로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던 점이나 출국직전에 당내부, 청와대와 여러가지 협의를 한 점등은 더욱 그의 발언이 계산된 것이라는 심증을 뒷받침해 준다. 다만 그 시기선택에 있어 당내에서 미리 충분한 상의가 있었는지, 혹은 윤대표 스스로가 추찰해서 발언의 시기를 정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민정당은 과연 내각책임제개헌을 추진해야할 이유가 있으며 또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을 것인지가 관심거리다.
민정당 내부에서는 88이후 국회특위·중간평가 등급격하게 밀어닥칠 정국변화에 대응할 수단은 내각제 뿐이라는 검토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당의 고위층에서도 『다음 대통령선거도 직선으로 한다면 나라가 쪼개지고 말것』이라고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내각책임제개헌을 의한 명분은 충분하다. 우리의 민도나 경제적 발전수준이 이를 감당할만큼 성숙해 있으며 또 지난 대통령선거·총선에서 나타난 우려할만한 지역감정을 해소해야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수 있다. 그러나 민정당으로서는 내각제를 추진해야할 현실적 필요성이 특히 크다.
우선 민정당에는 다음 국회,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자칫하면 민정당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존립의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다. 뚜렷한 구심점 없이 표류하고 있는 민정당으로서는 3김씨란 정치적 스타를 갖고있는 야당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원내 다수의석으로 승부하는 내각책임제가 바람직스러운 점이 있는 것이다.
민정당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음에 반해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민정당과 밀착시키는데는 내각제가 접착제역할을 할수 있다.
또 한가지 요인은 당내외의 후계세력을 구성하고있는 실세들이 거의가 군출신으로서 이들은 군출신이 또다시 대통령후보가 되기 어려운 대통령직선제보다는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후계 세력으로 지목되는 인물 중 이종찬 의원같은 이는 개헌에 소극적이지만 박준병 사무총장(육사12기)·정호용 의원(육사11기)이나 당외의 김복동(육사11기)·박세직(육사12기)씨 등의 범여권 후보감들의 입장은 다수당의 당권을 장악해 수상이 되는 길을 열어 놓고있는 내각제로 기우는 경향들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약 민정당이 드러내놓고 내각제를 추진할 경우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을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가능케 한 6·29선언으로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해온 정부·여당이 그들의 지금까지의 논리를 뒤집는 결과가 될 수 있으며 아직 대통령제를 더 선호하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적 반발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각제개헌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하면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가 노 대통령이 수상직을 맡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노 대통령 자신은 내각제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가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한다는 비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뭏든 일단 내각제의 애드벌룬이 띄워졌고 특히 JP쪽에서도 강력한 추진의사를 드러내고 있어 개헌논의가 의외로 빨리 현실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2 찬성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절차적인 어려움 외에도 대권에의 재도전 집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김대중·김영삼 두 김 총재가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야당의원들간에는 내각제에 호의적인 의원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이 두 김씨의 고리를 벗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김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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