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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누군가에게 꼭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1)

휴일에 비도 오고 해서 도서관에 왔다.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몰려와 내 시간을 다 빼앗고, 그렇지 않으면 TV나 켜놓고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어 가끔 도서관을 이용한다.

한 달 전에 지인이 책 한권을 추천하며 도서관 가면 꼭 빌려 보라고 말했다. 그 책이 도서관에 왔다고 연락이 와 마음이 더 설렜다. 그동안 도서관에 갈 때마다 그 책을 주문했지만 세권이 모두 대출 중이라고 해 헛걸음을 쳤다. 그렇게 다음 주, 또 다음 주에 가서 주문했는데 그때마다 대출 중이었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선 이기주 작가의 책들은 모두 다 대출 중이다. [사진 송미옥]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선 이기주 작가의 책들은 모두 다 대출 중이다. [사진 송미옥]

‘뭐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책도, 유명작가의 책도, 더군다나 TV나 신문에 소개된 책도 아닌데 더 궁금하네’ 하며 예약 주문을 넣어 놨는데 드디어 빌려 갈 차례가 된 것이다.

도서관 갈 때마다 그 책이 없어 허탕

책은 어느 책보다 작고 소담하지만 그 속에 있는 내용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편안한 풍경의 수필이다. 평범하지만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 몇 편 정도는 내가 주인공이 돼 새로운 나를 발견할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다 읽고 저자를 검색해봤다. 감동을 선물해준 책이니까 글쓴이는 곧 마음을 나눈 사람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미 몇 권의 책을 냈으나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책은 자신의 절박한 마음을 담았고, 열심히 달리는 이웃 사람의 그림자 같은 이야기라는 데에 놀랐다. 섬세하고 감동을 주는 표현으로 미루어 작가가 여성이라 느꼈는데, 여자 이름 같은 젊은 남자 작가란 것에도 놀랐다.

에세이집 『언어의 온도』(왼쪽)를 쓴 이기주 작가(오른쪽). [중앙포토]

에세이집 『언어의 온도』(왼쪽)를 쓴 이기주 작가(오른쪽). [중앙포토]

우리가 사는 삶도 들여다보면 모두가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특별한 뉴스와 이유 없어도 하루하루 잘살아간다. 일하고 아이 키우고 눈만 뜨면 남편·아내와 투닥거리고 화해하고 먹고 싸고 잔다. 그것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미건조한 틈 사이로 따뜻한 한마디 위로와 농담과 격려를 해줄 이웃이 있다면 그 삶의 온도는 조금 더 높게 올라갈 것이다. 가끔은 사람이 아닌, 이렇게 책으로라도 위로를 받고 감동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어제는 오래된 인연이지만, 요즘 와서는 만남은커녕 아주 가끔 전화로만 안부를 묻는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젊은 시절엔 자주 만났지만 나이 따라, 몸 따라 거리도 계산이 되어 그리되었다. 그러면서도 늘 “몸은 멀어도 마음은 언제나 함께”라는 구호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이다.

한곳에서 오래도록 살아 그 도시를 지나갈 때면 연락도 없이 찾아가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 편안한 사람, 몸이 아플 땐 생각나지 않아도 마음이 아플 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그런 지인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타향으로 이사했으니 한번 오라는 것이다.

아파트가 살기 편하다며 죽을 때까지 살 것 같다고 하셨던 분이 아파트를 벗어나 좋은 터에 멋진 전원주택을 지어 흙을 좋아하게 된 걸 보니 이젠 어르신 대열에 자진해서 낀 거 아니냐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함께 다니는 지인들과 집들이 갈 때 얹혀 가겠노라 했지만 개인 손님으로 초대한 것이고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많아서 그러니 하룻밤 잘 시간을 만들어 따로 오란다. 이번 달엔 이런저런 일로 시간이 안 되고 다음 달이라야 된다고 하니 그 날짜에 동그라미 쳐 놓고 기다리겠단다. 그러면서 내가 첫 손님이니 너무 늦지 않게 와달라고 하신다.

내가 가끔 이용하는 도서관이다. 나도 불러주고, 예약하고, 찾아주며, 보고 싶을 땐 볼 수 있는 도서관 같은 사람, 그런 책이 되고 싶다. [사진 송미옥]

내가 가끔 이용하는 도서관이다. 나도 불러주고, 예약하고, 찾아주며, 보고 싶을 땐 볼 수 있는 도서관 같은 사람, 그런 책이 되고 싶다. [사진 송미옥]

아무런 스펙도 없고, 유명인사도 아니고, 돈을 펑펑 쓰며 유세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도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빠지면 허전한 모임이 있다. 부르면 바쁜 일을 미루고 달려가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다. 허전한 마음을 안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다가가면 봄 같은 희망을 건져 올 수 있는 사람이다.

멋진 말이나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던지는 농담이나 유머 한 마디 한 마디가 딱딱한 언어에 스며들어 따뜻한 솜사탕같이 녹아내린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기쁜 소식을 만들어 기다려주니 시간을 내 찾아가 봐야겠다.

오늘 전화는 내가 책을 주문해놓고 예약을 해놓은 것처럼 마치 ‘꼭 보고 싶은 멋진 사람’으로 지인의 수첩에 분류된 것 같아 혼자서 기분 좋게 ‘하하하’ 웃었다.

도서관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살고파

TV에선 미세먼지로 온 국민이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무시무시한 뉴스가 나오고 있지만 내 옆에 있는 따뜻한 사람, 따뜻한 책 한권으로 거름기 없는 마음의 땅을 파헤쳐서 중년의 인생화단을 또다시 만들어 본다. 그렇게 봄이 지나갈 때면 나 또한 인고의 세월 속에 묻어 놓았던 언어의 씨앗이 하나둘 연륜의 꽃을 피우며 누군가의 그대가 되어 줄 것이라 희망을 가져본다.

불러주고, 예약하고, 찾아주며, 보고 싶을 땐 볼 수 있는 도서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 그런 책이 되고 싶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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