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일정 발표에 정부는 “비핵화의 시작”(14일 문재인 대통령)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풍계리 폐기 뒤에 숨은 허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미 전문가들은 북한의 ‘임계전 핵실험(subcritical nuclear test)’ 수행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임계전 핵실험은 플루토늄이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초고온 및 초고압을 가해 물질들의 거동 정보와 무기화 정보를 획득하는 실험이다. 폭발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컴퓨터상에서 핵폭발 자체를 거의 정확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북한, 지난달 “임계전 핵실험 실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정보 얻어 #단기간 내 핵 재건 가능하다는 뜻 #“핵심 과학자들 해외로 내보내야”
북한은 지난달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단을 발표할 때 “임계전 핵실험과 지하 핵실험,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초대형 핵무기 및 운반수단 개발을 위한 사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핵무기 개발을 실현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여섯 차례의 지하 핵실험 외에 임계전 핵실험 사실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관련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북한에 임계전 핵실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풍계리를 닫아도, 지하 폭발 핵실험 없이 핵무기를 개량하고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북한이 핵물질을 은닉하거나 추후에라도 불법적으로 들여온다면 임계전 핵실험을 통해 몰래 단기간 내에 핵을 재건할 수 있다”고 전했다. 임계전 핵실험은 섬광이 발생하지 않아 위성으로 관측할 수 없고, 지진파도 미약해 감지가 쉽지 않다.
북한이 이를 공개한 배경에 대해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미 미들버리 국제관계연구소의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아 버거 선임 분석가의 말을 인용해 “이는 핵무기를 보유한 채로 책임 있는 핵 관리자가 되겠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신창훈 박사는 “북한이 이런 식으로 명백한 안보리 결의 위반 사실을 ‘자백’한 배경은 국제사회가 못 본 척 넘어가 주기를 기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공식적 비판이 없다면 북한은 이를 용서의 신호로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북한이 미래에 다시 핵을 개발할 가능성까지 차단하겠다며 영구적이며,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PVID)를 강조하는 것도 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3일(현지시간) 미 ABC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 능력을 철저히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특히 미국이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하면서 검증의 기준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볼턴 보좌관은 “이란은 핵 프로그램과 관련한 군사적 활동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2007년 파르친 군사시설에서 (핵)무기화 실험을 한 게 밝혀졌는데도 부인했다”고 지적했다.
35년간 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 재직하며 핵무기 폐기 등에 관여한 핵 과학자 셰릴 로퍼는 12일(현지시간) “일부 군축 전문가들이 임계전 핵실험을 한 것으로 보이는 파르친에 대한 사찰을 문제 삼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를 깼는데 북한에도 비슷한 사찰 기준을 고집한다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이는 북한의 핵 연구 데이터와 핵 관련 과학자 등 무형기술(invisible technology)에 대한 검증과 직결된다. ‘핵 두뇌’가 건재한 이상 PVID 중 ‘되돌릴 수 없는’을 뜻하는 ‘I’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임계전 핵실험 시뮬레이션 자료, 컴퓨터 장비, 북한이 보유한 핵 물질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핵 과학자들인데, 핵심 인력만이라도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