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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노래하라” 프랑스 칸 물들인 빅토르 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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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레드카펫 행진을 벌인 여성들. 왼쪽 두번째부터 키어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이두, 카쟈 닌, 에바 두버네이, 케이트 블란쳇 등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들과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 [로이터=연합뉴스]

레드카펫 행진을 벌인 여성들. 왼쪽 두번째부터 키어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이두, 카쟈 닌, 에바 두버네이, 케이트 블란쳇 등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들과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 [로이터=연합뉴스]

여성 82명이 레드카펫 위를 행진했다. ‘82’는 1946년 칸영화제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경쟁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 작품 수. 1600편이 훌쩍 넘는 남성 감독 작품에 비하면 극히 일부다. “여성은 이 세상에서 소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현재 상황은 다릅니다.”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말이다.

중반 접어든 제71회 칸영화제 #러시아 영화 ‘레토’ 호평 잇따라 #감독은 가택연금, 유태오 주연작 #윤종빈 감독 ‘공작’은 반응 갈려 #성평등 촉구하는 행진도 벌어져 #제인 폰다·샐마 헤이엑 등 동참

12일(현지시간) 칸영화제에서 성평등을 촉구하는 행진이 벌어졌다. 레아 세이두, 키어스틴 스튜어트, 제인 폰다, 마리옹 코티야르, 샐마 헤이엑 등 이름난 배우들과 ‘원더우먼’의 패티 젠킨스 감독을 비롯해 영화계 각 분야 여성들이 동참했다.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는 “영화산업의 사다리는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며 “사다리를 오르자!”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남성중심적’이란 비판을 받아온 칸영화제에서 큰 이목을 끌었다. 올해도 21편의 경쟁부문 진출작 가운데 여성 감독 영화는 3편뿐. 여성 82명의 행진은 그 중 하나이자 쿠르드족 여성 결사대를 다룬 영화 ‘걸스 온 더 선’(감독 에바 허슨)의 공식 상영을 앞두고 펼쳐졌다.

‘레토’의 감독 이름을 들고 레드카펫에 선 배우 로만 빌리크, 이리나 스타르센바움, 유태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레토’의 감독 이름을 들고 레드카펫에 선 배우 로만 빌리크, 이리나 스타르센바움, 유태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일 개막한 제71회 칸영화제가 개막 2주차에 접어들면서 경쟁작들의 면면과 평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계 러시아 록커 빅토르 최(1962~90)를 다룬 러시아 영화 ‘레토’는 초반 상영작 가운데 큰 호평을 받았다. 옛 소련에 로큰롤이 태동하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젊음이 약동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모습과 풋풋한 로맨스를 매력적으로 그렸다. 한국배우 유태오는 2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통해 주인공 빅토르 최 역할을 맡았다.

미국 영화잡지 ‘버라이어티’는 “유태오의 연기는 빅토르 최가 왜 러시아에 불후의 록커로 남았는지를 흡인력 있게 보여준다”고 평했다. 불어로 발행하는 ‘르 필름 프랑세즈’에선 평가에 참여한 프랑스 매체 15곳 중 6곳이 만점에 해당하는 황금종려 가지를 선사, 지금껏 공개된 경쟁작 7편 중 가장 호평했다. 미국·영국·프랑스·중국 등 10개국 평론가가 참여한 ‘스크린’별점에선 4점 만점에 2.4점을 매겼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이미지의 책’(3점), 중국 지아장커 감독의 ‘애쉬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2.9점)와 폴란드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콜드 워’(2.9점)에 이어 7편 중 4번째다.

빅토르 최

빅토르 최

‘레토’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푸틴이 가장 싫어하는 감독”이라 할 만큼 비판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당국에 가택연금을 당해 9일 공식 상영에 참석하지 못했다. 배우와 제작진은 레드카펫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보드 등을 들어 응원을 받았다. 주연 배우 유태오는 개막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이제껏 빅토르 최에 관한 영화는 만들려고 하면 번번이 불발됐다 들었다”면서 “감독님은 이 성스러운 예술가를 세상에 다시 내보이면 그 힘이 우리에게도 돌아온다 말했다”고 전했다.

‘공작’으로 칸을 찾은 황정민, 윤종빈 감독, 이성민, 주지훈. [EPA=연합뉴스]

‘공작’으로 칸을 찾은 황정민, 윤종빈 감독, 이성민, 주지훈. [EPA=연합뉴스]

비경쟁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선보인 한국영화 ‘공작’은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핵 개발을 파헤쳤던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황정민 분)의 실화를 10년 간 뒤엉킨 남북한 정세 속에 풀어낸 첩보극이다. 미국 영화잡지 ‘스크린’은 “이 영화에 오가는 말들은 총알보다 더 아프게 박힌다”며 “단단한 지성으로 빚어낸 뛰어난 첩보물”이라 호평했다. 또 다른 잡지 ‘할리우드리포터’는 “첩보물보다는 잘 만든 정치 폭로극”이라며 다만 복잡한 시대 배경이 소개되는 초반부는 “해외 관객에겐 누가 누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몰라 혼란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현재 남북관계와 맞아떨어지는 시의적절한 영화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극 중 흑금성이 오래 교류해온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 분)과 빚어내는 장면은 최근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대화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들은 공식 상영 뒤 한국 기자들과 만나 “신기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영화의 바탕은 실제 ‘흑금성’으로 불렸던 박채서씨의 수기다. 윤종빈 감독이 그에게 직접 수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윤 감독은 “수기의 묘사가 굉장히 자세해서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것들을 덜어내는 위주로 각색했다. 극 중 거의 모든 캐릭터에 실존인물이 있다고 보면 된다”며 “결국 하고자 한 건 적이라 믿었던 사람이 동지였고 아군이 적인 걸 알게 되는 스파이의 정체성 얘기”라고 말했다. ‘공작’은 지난해 북핵 문제가 위태로울 때 제작에 돌입했다. 윤 감독은 “박근혜 정권 때였고 영화계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며 “‘흑금성’이란 제목이 알려지면 왠지 안 좋을 것 같아 일단 가제로 정한 제목이 ‘공작’이다. 쓰다보니 괜찮아서 정식 제목이 됐다”고 했다. 흑금성을 연기한 황정민은 “진정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엔 이데올로기 같은 게 필요 없다는 걸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한국영화로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초청된 유아인·전종서·스티브 연 주연의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은 현지시간 16일 저녁 공식 상영을 갖는다. 국내 극장가에선 17일 개봉한다.

칸(프랑스)=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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