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노래하라” 프랑스 칸 물들인 빅토르 최

중앙일보

입력 2018.05.1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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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레드카펫 행진을 벌인 여성들. 왼쪽 두번째부터 키어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이두, 카쟈 닌, 에바 두버네이, 케이트 블란쳇 등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들과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 [로이터=연합뉴스]

레드카펫 행진을 벌인 여성들. 왼쪽 두번째부터 키어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이두, 카쟈 닌, 에바 두버네이, 케이트 블란쳇 등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들과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 [로이터=연합뉴스]

여성 82명이 레드카펫 위를 행진했다. ‘82’는 1946년 칸영화제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경쟁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 작품 수. 1600편이 훌쩍 넘는 남성 감독 작품에 비하면 극히 일부다. “여성은 이 세상에서 소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현재 상황은 다릅니다.”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말이다.

중반 접어든 제71회 칸영화제
러시아 영화 ‘레토’ 호평 잇따라
감독은 가택연금, 유태오 주연작
윤종빈 감독 ‘공작’은 반응 갈려

성평등 촉구하는 행진도 벌어져
제인 폰다·샐마 헤이엑 등 동참

12일(현지시간) 칸영화제에서 성평등을 촉구하는 행진이 벌어졌다. 레아 세이두, 키어스틴 스튜어트, 제인 폰다, 마리옹 코티야르, 샐마 헤이엑 등 이름난 배우들과 ‘원더우먼’의 패티 젠킨스 감독을 비롯해 영화계 각 분야 여성들이 동참했다. 90세 프랑스 감독 아네스 바르다는 “영화산업의 사다리는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며 “사다리를 오르자!”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남성중심적’이란 비판을 받아온 칸영화제에서 큰 이목을 끌었다. 올해도 21편의 경쟁부문 진출작 가운데 여성 감독 영화는 3편뿐. 여성 82명의 행진은 그 중 하나이자 쿠르드족 여성 결사대를 다룬 영화 ‘걸스 온 더 선’(감독 에바 허슨)의 공식 상영을 앞두고 펼쳐졌다.

‘레토’의 감독 이름을 들고 레드카펫에 선 배우 로만 빌리크, 이리나 스타르센바움, 유태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레토’의 감독 이름을 들고 레드카펫에 선 배우 로만 빌리크, 이리나 스타르센바움, 유태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일 개막한 제71회 칸영화제가 개막 2주차에 접어들면서 경쟁작들의 면면과 평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계 러시아 록커 빅토르 최(1962~90)를 다룬 러시아 영화 ‘레토’는 초반 상영작 가운데 큰 호평을 받았다. 옛 소련에 로큰롤이 태동하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젊음이 약동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모습과 풋풋한 로맨스를 매력적으로 그렸다. 한국배우 유태오는 2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통해 주인공 빅토르 최 역할을 맡았다.

미국 영화잡지 ‘버라이어티’는 “유태오의 연기는 빅토르 최가 왜 러시아에 불후의 록커로 남았는지를 흡인력 있게 보여준다”고 평했다. 불어로 발행하는 ‘르 필름 프랑세즈’에선 평가에 참여한 프랑스 매체 15곳 중 6곳이 만점에 해당하는 황금종려 가지를 선사, 지금껏 공개된 경쟁작 7편 중 가장 호평했다. 미국·영국·프랑스·중국 등 10개국 평론가가 참여한 ‘스크린’별점에선 4점 만점에 2.4점을 매겼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이미지의 책’(3점), 중국 지아장커 감독의 ‘애쉬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2.9점)와 폴란드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콜드 워’(2.9점)에 이어 7편 중 4번째다.

빅토르 최

빅토르 최

‘레토’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푸틴이 가장 싫어하는 감독”이라 할 만큼 비판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당국에 가택연금을 당해 9일 공식 상영에 참석하지 못했다. 배우와 제작진은 레드카펫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보드 등을 들어 응원을 받았다. 주연 배우 유태오는 개막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이제껏 빅토르 최에 관한 영화는 만들려고 하면 번번이 불발됐다 들었다”면서 “감독님은 이 성스러운 예술가를 세상에 다시 내보이면 그 힘이 우리에게도 돌아온다 말했다”고 전했다.

‘공작’으로 칸을 찾은 황정민, 윤종빈 감독, 이성민, 주지훈. [EPA=연합뉴스]

‘공작’으로 칸을 찾은 황정민, 윤종빈 감독, 이성민, 주지훈. [EPA=연합뉴스]

비경쟁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선보인 한국영화 ‘공작’은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핵 개발을 파헤쳤던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황정민 분)의 실화를 10년 간 뒤엉킨 남북한 정세 속에 풀어낸 첩보극이다. 미국 영화잡지 ‘스크린’은 “이 영화에 오가는 말들은 총알보다 더 아프게 박힌다”며 “단단한 지성으로 빚어낸 뛰어난 첩보물”이라 호평했다. 또 다른 잡지 ‘할리우드리포터’는 “첩보물보다는 잘 만든 정치 폭로극”이라며 다만 복잡한 시대 배경이 소개되는 초반부는 “해외 관객에겐 누가 누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몰라 혼란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현재 남북관계와 맞아떨어지는 시의적절한 영화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극 중 흑금성이 오래 교류해온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 분)과 빚어내는 장면은 최근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대화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들은 공식 상영 뒤 한국 기자들과 만나 “신기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영화의 바탕은 실제 ‘흑금성’으로 불렸던 박채서씨의 수기다. 윤종빈 감독이 그에게 직접 수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윤 감독은 “수기의 묘사가 굉장히 자세해서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것들을 덜어내는 위주로 각색했다. 극 중 거의 모든 캐릭터에 실존인물이 있다고 보면 된다”며 “결국 하고자 한 건 적이라 믿었던 사람이 동지였고 아군이 적인 걸 알게 되는 스파이의 정체성 얘기”라고 말했다. ‘공작’은 지난해 북핵 문제가 위태로울 때 제작에 돌입했다. 윤 감독은 “박근혜 정권 때였고 영화계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며 “‘흑금성’이란 제목이 알려지면 왠지 안 좋을 것 같아 일단 가제로 정한 제목이 ‘공작’이다. 쓰다보니 괜찮아서 정식 제목이 됐다”고 했다. 흑금성을 연기한 황정민은 “진정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엔 이데올로기 같은 게 필요 없다는 걸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한국영화로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초청된 유아인·전종서·스티브 연 주연의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은 현지시간 16일 저녁 공식 상영을 갖는다. 국내 극장가에선 17일 개봉한다.

칸(프랑스)=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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