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서울대가 세계 1등이 돼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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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전호환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부산대 총장)

전호환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부산대 총장)

 작년 11월 방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회에서 한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지난 60여 년간 우리나라가 만들어낸 정치적ㆍ경제적 발전은 ‘기적’이라고 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현실 속에서 이룩한 이러한 기적은 전 세계 자유민주국가의 발전모델이 되었다고 했다.

그가 연설 중에 언급한 골프 이야기는 가식이 없는 찬사 그 자체였다. “올해 뉴저지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개최된 US여자오픈에서 훌륭한 한국 골프 선수인 박성현이 승리했습니다. 상위 10위권 선수들 중 8명이 한국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1, 2, 3, 4위, 즉 상위 4위권 안에 들었던 선수 모두가 한국 선수들이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굉장합니다.”

박세리의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은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나라 여성 골프의 신호탄이었다. 박세리가 보이지 않는 벽인 ‘유리천장’을 깬 것이다. 같이 연습하던 친구가 세계무대에서 1등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자기규정효과(self-definition effect)’가 많은 동료와 후배에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많은 ‘박세리 키즈’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이들이 세계 여자 골프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 경쟁력이 국가 경제력에 비해 뒤쳐져 있다는 비판이 많다. 2018년 QS 세계대학평가에서 서울대 36위, KAIST 41위로 두개의 대학만이 50위권에 위치했다. 미국은 상위 30위권에 무려 15개의 대학이 포진했다. 지식정보화 기술에 이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연 신경제(new economy)의 주요 발원지는 스탠포드와 버클리가 위치한 실리콘밸리였다. 하버드와 MIT가 위치한 보스턴 인근도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의 나아갈 길을 정하는 요람이 됐다.

미국이 세계지식 파워를 독점하고, 대학 주도의 신경제 모델을 통해 지속적으로 세계경제를 선도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두번의 입법을 통한 의회의 막대한 재정지원이 있었다. 1862년 ‘모릴 토지양여법(the Morril Land-Grant Act)’을 통해 주립대학 설립을 위한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재정 지원도 했다. 이를 통해 106개의 주립대학이 미국 전역에 탄생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의회는 세계 최고의 연구중심대학을 구축하기 위해 기초연구와 대학원 교육에 집중 투자하는 재정지원 입법을 또 다시 단행했다. 세계 대학 순위 30위권에 포진한 미국의 15개 대학은 모두 연구중심대학이다. 이들 대학의 재정은 서울대의 재정보다 4∼6배 많은 수준이다. 대학의 재정이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대학들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세계대학 평가순위가 대학재정 순위와 비슷한 것이 그 증거다.

재정이 많다고 평가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성과는 주어진 환경에서 내부의 잠재적 자산을 극대화할 때 의미가 있다. 서울대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와 교육·연구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간 혁신을 위한 노력과 국가 미래 비전 제시에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부의 자성론과 고해를 담은 보고서도 나오고 있다. 대선이 있을 때 마다 ‘서울대 폐지론’이 나오는 것은 더 분발하여 잘하라는 기대 섞인 질타일 것이다. 우리나라 모든 대학에 똑같은 재정지원을 통해 모두가 1등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분배정책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진정한 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 수준의 대학과 인재를 갖추어 그 파급효과를 통해 많이 대학들이 경쟁력을 갖춰가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서울대가 우리나라 대학의 ‘박세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전호환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부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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