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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다녀온 한국 남자들, 총 들고 모여라" 26년 전 5월 LA서 일어난 일

중앙일보

입력

26년 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은 일주일간 무법천지로 변했다. 방화·약탈·폭행·총격 사건으로 인해 총 63명이 사망하고 2300여 명이 다치고 약 10억 달러(한화 1조원)의 재산손실이 일어났던 그 사건. 한인 이민 역사상 가장 큰 아픔으로 기억되는 이 사건의 발단은 우연과 필연의 결합물이었다.

1991년 3월 16일 로스앤젤레스 흑인 밀집 지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두순자씨가 주스를 훔치려던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16)와 실랑이하다 우발적으로 총으로 쏴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두 씨는 살인죄로 기소됐으며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재범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백인 여성 판사가 두 씨에게 내린 판결은 집행유예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슈퍼를 운영하던 두순자씨가 오렌지 쥬스를 훔치려던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16)와 실랑이하다 우발적으로 총으로 쏴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당시 녹화된 CCTV는 미국 언론에 반복돼 방송되면서 흑이폭동 당시 한인타운이 주 표적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슈퍼를 운영하던 두순자씨가 오렌지 쥬스를 훔치려던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16)와 실랑이하다 우발적으로 총으로 쏴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당시 녹화된 CCTV는 미국 언론에 반복돼 방송되면서 흑이폭동 당시 한인타운이 주 표적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2주 전 3월 3일,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 운전을 한 흑인 로드니 킹을 차에서 끌어 내린 뒤 무차별 폭행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우연히 촬영한 시민에 의해 폭행 장면은 방송에 공개되고 경찰관들은 폭행혐의로 기소됐다.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 운전을 한 흑인 로드니 킹을 차에서 끌어내린 뒤 무차별 폭행 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드니 킹은 총기를 소지하거나 위협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과잉진압했다는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 운전을 한 흑인 로드니 킹을 차에서 끌어내린 뒤 무차별 폭행 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드니 킹은 총기를 소지하거나 위협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과잉진압했다는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다음 해 4월 29일 로드니킹 재판 당일, 주로 백인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에 의해 가해 경찰관 3명은 무죄, 1명은 평결 유보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판결 소식을 듣고 분노한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오며 폭동이 시작됐다. 흑인들은 지나가던 백인 운전자들을 차에서 끌어내려 구타했으며 가게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29일 로드니킹 재판이 끝난 직후 흑인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오며 LA폭동이 시작됐다. 분노한 흑인들은 상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했다.

1992년 4월 29일 로드니킹 재판이 끝난 직후 흑인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오며 LA폭동이 시작됐다. 분노한 흑인들은 상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했다.

흑인들의 분노는 이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장태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백인에 비해 빈부격차가 심하고, 중퇴율이 높아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으며 경찰은 흑인에게만 과잉진압을 일삼았기 때문에 분노는 만연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분노가 로드니 킹 사건으로 폭발했고, 그 화살이 경찰과 공권력을 향할까 우려한 미국 사회와 언론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 미국 사회 고질적 흑인 차별이 마치 그들을 깔보고 무시한 한인 상인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비쳤다. 또한 한인들은 임대료가 저렴한 흑인 밀집 지역에서 상점을 많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컸다.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첫날 코리아타운을 가는데 폭도들이 돌을 던지면서 다가왔다. 차를 빼서 다른 곳으로 돌아가니까 이미 아파트가 불타고 있었고, 백화점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서 나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0개가 넘는 한인 상점들은 약탈당하고 불바다가 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힘들게 일궈온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인들은 스스로 방어에 나섰다.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고 방어에 나섰다.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고 방어에 나섰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은 "이러다가 한인타운이 없어지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민 와서 30년 동안 만들어낸 한인타운이 불에 타는 걸 보고 우리 업소는 우리가 지키자는 캠페인을 벌였다"고 말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유일한 한인 방송국인 라디오코리아는 비상 방송을 하며 피해 한인을 도왔다.

5월 4일이 돼서야 톰 브래들리 당시 시장은 폭동이 종식됐음을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은 폭동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한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한인 방송국에 방문했다.

부시 대통령은 폭동이 끝난 후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해 한인들을 위로했다.

부시 대통령은 폭동이 끝난 후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해 한인들을 위로했다.

최 부회장은 “라디오코리아 건물 중심으로 한인타운의 구호센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통령도 이곳을 찾았다”며 “정부도 도울 테니 힘을 모아 피해를 극복하는데 앞장서자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미국 대통령의 언론사 방문은 이례적인 경우로 당시 한인들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폭동은 끝났지만, 이 사건은 흑인과 한인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미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 3월 18일에는 아이폰을 총기로 오인해 22세 흑인 청년이 경찰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 14일 필라델피아 스타벅스에 있던 무고한 흑인 남성 두 명을 경찰이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민들은 ‘커피는 까만색이다(Coffee is black)’란 피켓을 들고 스타벅스 불매운동에 나섰다.

김 전 회장은 “지금은 인종갈등보다 빈부갈등이 더 심하다. 하지만 이 빈부의 격차도 결국 각 인종이 처한 상황과 기회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변형된 형태의 인종갈등이다.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한 미국 사회의 이런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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