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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의 영혼에 바쳐진 ‘진짜 창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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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30면

국립창극단 ‘심청가’

고운 청자빛 두루마기 또는 알록달록 선명한 색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녀 소리꾼이 하나둘 몸을 들썩이며 등장한다. 앙증맞은 족두리로 각을 잡은 ‘소리꾼의 대명사’ 안숙선 명창이 중앙에 자리를 잡으니 화룡점정이다. “옛날 황주 도화동 사는 봉사 한 사람이 있난디…”. 고수의 장단에 맞춘 평범한 시작이지만 이내 우렁찬 판소리 합창이 더해지고 여기에 대나무발 스크린 뒤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국악오케스트라의 구성진 반주가 가세한다. 객석도 저들이 안내하는 옛이야기 여행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심청가’는 그간 선보여온 실험적 무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심청가 사설 전체를 외울 만큼 판소리에 애정이 깊은 손진책 연출이 애초에 “판소리 본질에 충실한 정통성 있는 대표 창극을 만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통성 있는 대표 창극’이라니, 무슨 뜻일까.

사실주의적 재현을 하는 서양 연극과 달리 동양 전통극의 특징은 양식미에 있다. 중국의 경극도, 일본의 가부끼나 노 등도 걸음걸이부터 연기, 무대와 분장, 의상까지 정형화된 틀이 있다. 우리의 판소리도 그러한데, 20세기초 이를 극장식 극예술로 확장시킨 창극은 고유한 스타일도 정립하지 못한 채 구닥다리 취급을 받아왔다. 김성녀 예술감독이 그간 가열차게 ‘열린 시도’를 해온 이유다. 그래서 이번 ‘심청가’는 5년여 실험 끝에 ‘진짜 창극이란 이런 것’이라고 집대성하는 의미도 있다. 결과물은 어땠을까.

키워드는 단 하나, ‘소리꾼’이었다. ‘귀명창들을 위한 공연’이란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가 주인공이었다. 군더더기는 티끌만큼도 없는 온전한 전통의 소리. 이에 걸맞게 무대도 심플했다.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가 자작나무 모노톤으로 통일한 6개의 모듈과 2개의 교자상, 크고 작은 의자 형태들의 조합은 대청마루가 되었다가 배도 되었다. 또 징검다리도 되고 개다리소반도 되며 20여개 장면을 만들어 냈다. 대나무발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상도 미니멀했다. 어떤 창극에도 활용가능한 가변형 무대의 탄생이다.

빈 무대를 채우는 건 오직 소리꾼들뿐이지만, 김영진 디자이너의 ‘비비드한’ 의상과 신발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돋보이게 했다. 형태 변형 없는 전통 한복이었지만 청자색, 백자색 등 고급스런 색감의 어우러짐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가난한 심청 부녀에게 비단옷이 왠말이냔 반응도 있지만, “배역보다 소리꾼으로서의 자아가 앞서는 무대”라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소품도 소리꾼 각자와 일체가 된 부채가 전부. 부채 하나면 빨래 방망이도, 뱃사공의 노도, 봉사들의 지팡이도 필요 없었다.

초기 창극의 유일한 스타일, ‘분창’의 형식은 뚜렷해졌다. 아니리 위주로 이끌어가는 도창을 필두로, 그간 굶주렸던 소리꾼들은 모두가 주인공인양 소리의 향연을 펼쳤다. 안숙선 명창은 깜짝 놀랄만큼 쩌렁쩌렁한 목청을 과시했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같은 판소리 합창도 강렬했다. 대표적인 눈대목 ‘범피중류’는 합창의 기운과 함께 활짝 편 부채춤 안무로 망망대해에 일렁이는 물결을 만들며 눈대목에 걸맞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전통의 특징인 해학과 골계미도 살아 있었다. 심봉사와 화주승의 만남, 뺑파의 너스레, 봉사들 눈뜨는 대목 등에선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려운 판소리 사설에 숨어있는 유머코드가 잘 보이도록 소리를 연기로 재해석해낸 연출적 미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특히 돋보이는 건 ‘소리꾼의 원형’과도 같은 도창의 롤이었다. 잠시도 퇴장하지 않고 배우들 연기에 참견하고, 덩실덩실 춤도 추며 극을 넘나드는 안숙선 명창의 모습은 1인극 판소리에 대한 오마쥬로 비쳤다. ‘안숙선 헌정 공연’을 넘어 ‘21세기 창극 배우로 거듭난 19세기 소리꾼의 영혼에 바쳐진 무대’라고 하면 어떨까.

‘진짜 창극’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이 있었다. 소리만으로 이어지고, 소리꾼 각자가 주인공이 되며, 전통 특유의 해학이 번득이고, 무한대의 확장성을 품은 미니멀한 무대에, 화려하고도 우아한 고유의 색감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한 의상까지. 먼 길을 돌아 우리의 피 속에 답이 있었다.

기간: 5월 6일까지
장소: 명동예술극장
문의: 02-2280-4114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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