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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쓰고 나온 대한항공 직원들…"조씨 일가 퇴진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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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가 시작되기 30분 전인 4일 오후 6시30분쯤 가면을 쓴 다섯 명의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한 가운데에 앉았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로 유명해진 저항의 상징 '가이 포크스' 가면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면을 쓴 사람들은 하나 둘 늘어 계단을 빼곡히 채웠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촛불집회'에서 대한항공 직원과 시민들이 '가이 포크스' 마스크를 쓰고 피켓을 들었다. 김경빈 기자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촛불집회'에서 대한항공 직원과 시민들이 '가이 포크스' 마스크를 쓰고 피켓을 들었다. 김경빈 기자

이들은 대한항공 소속 직원들이었다. 이날 광화문에서는 대한항공 직원들로 구성된 '대한항공 직원연대'의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점차 늘어나 오후 7시20분쯤이 되자 500명을 넘어섰다. 직원들은 대부분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가면이나 마스크 등을 썼다. 대한항공 유니폼 차림으로 마스크를 쓴 한 참가자는 "조씨 일가가 완벽히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고 우리 모두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 목표다"며 "이 자리에 온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갑질논란 조향호는 퇴진하라, 퇴진하라!""갑질폭행 이명희를 구속하라, 구속하라!""지켜내자 대한항공, 물러나자 조씨일가"""갑질세트 조현아 조현민을 추방하라!"….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손에는 '어디까지 해봤니 갑질 밀수 고함 밀수''기본 인권 보장하라' 등의 피켓이 들려 있었다.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집회 사회를 맡은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은 "저는 항상 비닐봉지에 아버지 사진을 가지고 있다. 저도 한 가족의 일원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기 위해서다"고 발언했다.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피해자였던 박 전 사무장이 "4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동료들 덕분이다"며 잠시 울먹이자 사람들은 "울지마""괜찮아"라고 연호했다. 그 역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스크에 검은 망토 차림으로 집회에 나온 객실 승무원 A씨는 "작년에 직원들의 연차가 100일 남았다는 기사가 났는데 그 기사가 나니까 회사에서는 오히려 승무원 인원을 줄이겠다고 했다"며 "이 일을 계기로 대한항공의 주인은 직원이고, 대한항공을 먹여 살리는 건 국민이라는 인식이 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가족들도 자리를 채웠다. 자신을 대한항공 직원의 아내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남편은 2000년도에 얼마나 직원들이 힘든지 이야기하며 바꿔보겠다고 나섰다가 해고가 됐었다. 지금은 복직했지만 대한항공은 그대로다"며 "여전히 정규직 직원들은 한 달에 100시간 넘게 비행하고, 상사들의 눈치를 보면서 근무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집회에 참여했다. 손을 들고 참가자들 앞으로 나온 강선미(51)씨는 "시흥에서 함께하기 위해 나왔다. 당장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럴수록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외쳤다. 한 시민은 대한항공 직원들을 응원하는 편지를 프린트 해 나눠주기도 했다.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제1차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이번 집회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갑질 및 비리를 제보하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부터 기획됐다. 기장·승무원·정비사·운항사 등 대한항공 소속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방이었다. 이들의 집회는 큰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의 도움 없이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가 바탕이 됐다. 직원들은 가면과 피켓 등을 직접 준비해 함께 나눴다. 1000명이 정원인 이 카톡방에서 사람들은 집회 전부터 '최소 한 정거장 전에 내려 마스크 쓰기''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기' 등 주의사항을 공유했다. 사측에서 집회 참석자를 찾아내 인사상 불이익 등을 줄 것을 우려해서였다.

비행 등의 일정이 있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다른 직원들은 카톡방을 통해 "우리 사우들 정말 멋집니다""멀리서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직원들은 이번 집회 이후에도 2차, 3차 촛불집회를 기약하며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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