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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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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 새하얗게만 보였던지. (…) 길이나 바위가 유난히 흰 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소설가 박완서가 여덟 살에 처음 개성을 봤을 때의 기억이다.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비친다. 박완서의 고향 경기도(현 황해북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개성까진 20리 산길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산골 소녀에겐 할아버지가 귀한 독일제 물감을 사오는 먼 동경의 도시였던 모양이다.

경기도 파주·고양시가 고향인 노인들 가운데에는 이와 유사한 기억을 간직한 이가 많다. 개성이 어린 시절 소풍 장소여서다. 고양 삼송리에서 자란 김정희(83) 할머니의 초등학교 5학년 때 개성 나들이 잔상도 ‘하얗고 정갈한 풍경’이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개울 바닥의 모래조차 희어서 얕은 줄 알고 들어갔다가 빠져 허우적댔지요.” 김 할머니는 “선죽교 핏자국이 하도 선명해 물로 씻어보기도 했다”며 “죽기 전에 다시 가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0년 전 다시 ‘개성 소풍’을 갈 기회가 있었다. 개성공단 개발과 연계해 2007년 12월 개성관광 길이 열려서다. 하지만 차일피일하다 박왕자씨 피격사건 여파로 이듬해 11월 개성관광이 중단되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쳤다. 그 1년 동안 11만549명이 개성을 다녀왔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개성 소풍에 대한 기대가 번질 조짐이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설치되고 개성공단 재개 가능성이 점쳐지면서다. 북녘땅이지만 개성은 그야말로 지척이다. 남측 경의선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에서 북측 판문역과 손하역만 거치면 개성역이다. 거리로는 22.9㎞다. 현재 경의선 광역전철이 대곡~문산 간 28.1㎞를 34분 만에 주파하는데 11개 역 정차시간을 감안한 표정(表定)속도가 시속 49.6㎞다. 도라산역에서 개성역까지 27분이면 닿는다는 얘기다.

남북은 2007년 각자 끊어진 경의선 철도를 복원해 문산~개성 간 화물열차를 1년 남짓 운행한 적이 있다. 당장에라도 개성행 열차 운행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해나가자는 게 남북 정상의 의중이다. 개마고원·백두산 트레킹은 좀 멀다. 당일치기가 가능한 개성 소풍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수월할 듯싶다. 김 위원장의 결단으로 내일부터 남과 북의 30분 시차도 사라지지 않는가 말이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