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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트럼프-김정은’ 닮은꼴의 위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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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정은과 시진핑이 중국 베이징에서 극비 정상회담을 하고 있던 3월 27일, 북한 통전(통일선전)부 부부장 맹경일은 상하이에 있었다. 그가 누군가. 북·미 회담을 주도하는 김영철 통전부장의 직계 인물.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엔 한국에 상주하며 한국 및 미국과의 창구 역할을 했다. 맹 부부장은 세상의 관심이 베이징에 쏠려 있는 동안 상하이에서 중국이 아닌 미국과 머리를 맞댔다. 상대는 미 CIA 간부들. 베이징의 ‘김정은-시진핑’ 회담보다 덜 중요한 것 같지만 실은 더 중요한 극비 접촉이었다. 이 자리에서 마이크 폼페이오(현 국무장관) CIA 국장의 방북이 전격 결정됐다. 나흘 후 CIA 전세기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폼페이오가 북한에 체류한 시간은 단 10시간. 하지만 이 10시간은 향후 10년, 아니 100년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역사에 남을 시간이었다.

양자 모두 즉흥적, 충동 합의 가능성 #‘느슨한 비핵화-ICBM 빅딜’ 막아야

‘김정은-폼페이오’ 평양 담판 이후 양측의 물밑 협상은 가파르게 진행됐다. 호흡도 척척 맞았다.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의 신변 안전이 가장 신경 쓰인다”고 털어놓자 트럼프는 “정상회담 후보지는 5곳”이라고 했다. 이미 실무진에선 2곳으로 좁혀져 있었지만 연막을 친 것이다. 시기도 5월 말로 잠정 결정됐지만 5월→6월 초→6월 중순 등으로 의도적으로 흘렸다. 혼선을 줬다. 김 위원장을 향해선 “열려 있고 훌륭하다”고 잔뜩 치켜세웠다. 180도 관점이 달라졌다. 김정은도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트럼프와 잘 통할 것 같다”고 화답했다.

우리는 판문점에서 김정은의 호쾌함, 거침없는 즉흥성을 봤다. 본인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의 행동일지 모르지만 대본에서 벗어난 돌발행동이 많았다. 문 대통령의 손을 잡고 북으로 ‘잠시’ 넘어갔다 온 것이나 남과 북의 30분 시차를 없앤 즉석 발언도 그랬다. 당시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저렇게 트럼프와 닮았을까”였다. 우선 말이 길고 장황하다. 주제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 과시욕이 강한 이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이미 미 정보 당국에선 김정은의 말과 억양, 보디랭귀지(몸짓) 등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 상태다. 44분의 도보다리 산책 중 의자에 앉아 있던 30분간 김정은의 입 모양을 읽은(독순술) 판독 대화록까지 이미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똑같은 캐릭터의 두 지도자 간 ‘충동 합의’다.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비핵화 과정을 하나하나 담은 합의를 이루긴 현실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결코 실패해선 안 되는 회담이다. 트럼프, 김정은 둘 다 그것을 잘 안다. 이런 상황에서 비핵화는 일단 느슨하게 원론적으로 다루고(‘승리했다’고 선전할 수 있을 정도로), ICBM 불능화와 북한에 대한 체제 보장에 전격 합의하는 ‘북·미 빅딜’이 이뤄지면 우리로선 악몽이다. 트럼프는 지금 CVID를 외친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성공, 노벨상만 얻을 수 있다면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더라도 합의해 줄 수 있는 인물임을 우리는 봐 왔다. ‘탄도미사일 금지’가 빠져 있다는 이유로 이란과의 핵 합의를 파기하려 하는 게 트럼프다. 미국은 인도·이스라엘·파키스탄이 ICBM을 갖지 않겠다고 하니 핵 보유를 허용한 나라다. 김정은도 이 틈을 파고들 것이다. 우리가 남북회담의 감격과 열기에서 깨어나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와 설득을 게을리해선 안 되는 이유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오버랩되는 캐릭터, 폼페이오 평양 담판 이후 전개되고 있는 급물살이 반갑지만 불안한 5월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