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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어쩐지 네가 자꾸 생각나…코끝 기억에 발걸음 멈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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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길을 걷다 불현듯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옛 애인이 떠오르고, 추로스 가게 앞에선 신나게 뛰어놀았던 놀이공원이 생각난 적 있는가. 이처럼 향기는‘향수’를 소환한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최고의 액세서리가 향기”라는 말을 남겼다. 최근 향기를 이용해 고객의 ‘추억 만들기’에

향기 입은 마케팅

나선 업체가 늘고 있다. 이제 발 없는 향이 고객의 발길을 잡는다.

사탕을 한데 모아 놓은 듯 달콤함이 코를 찌르는 향이 난다면 근처에 러쉬(영국 화장품 브랜드) 매장이 있을지 모른다. 또 길을 걷다 야성미 넘치는 남자에게서 날 것 같은 짙은 향을 맡았다면 아베크롬비 앤 피치(미국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있는지 찾아보라. 요즘은 이렇게 향기만으로도 특정 ‘브랜드’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가 있다. 이른바 ‘향기 마케팅’이다. 국내서도 호텔은 물론 패션·뷰티 업계, 쇼핑몰, 영화관, 공연장까지 다양한 공간이 향으로 가득하다.

직장인 이은별(31)씨는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 때문에 찾은 서울 당주동의 ‘포시즌스 호텔 서울’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청량하면서도 스파이시한 향이 그녀를 마중했기 때문이다. 향수 마니아인 이씨에게도 낯선 향기였다. 그녀는 “어떤 제품인지 호텔 직원에게 물어볼 정도로 향이 맘에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윤소윤 포시즌스 호텔 서울 홍보팀장은 “격식 있는 호텔을 표현할 수 있는 시그니처 향기를 개발했다”며 “외국인 투숙객 중에 고국에서 이와 비슷한 향을 맡고선 이곳에서의 행복한 기억이 되살아났다며 연락한 분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그니처 향기는 브랜드(의뢰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조향사(여러 향료를 섞어 새로운 향을 만드는 사람)나 향기 마케팅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탄생된다.

단지 ‘좋은’ 향기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 향기 마케팅의 목적은 아니다. 브랜드 고유의 향기는 고객이 특정 공간을 기억하게 만든다. 향기가 브랜드의 기억을 담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이 같은 향기의 기억 소환 능력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입에 베어 문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난 고향의 기억을 바탕으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것이 계기가 됐다.

실제로 프루스트 현상은 과학적으로도 밝혀졌다. 미국 미시간대 아라드나 크리시나 교수팀은 실험자 151명에게 아무 향도 나지 않는 연필, 소나무 향이 나는 연필, 차나무 향이 나는 연필 등 세 자루씩을 각각 나눠 주고 어떤 연필을 더 오래 기억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흔하지 않은 차나무 향의 연필을 가장 오래 기억했다(미국 ‘소비자연구 저널’, 2009). 색다른 향기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팀은 부부 96쌍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와 체취의 관계를 실험했다. 여성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남편의 셔츠에서 나는 체취와 다른 이성의 체취를 각각 맡게 했다. 그러자 남편의 체취를 맡은 여성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가 낮아졌고 다른 그룹은 오히려 그 수치가 높아졌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대학 교수는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를 맡고 행복한 기억이 떠올라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고객에게 안정감을 줘야 하는 숙박업이나 항공업에서 향기를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향을 맡으면 마음의 온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프랑스 브르타뉴대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흥미로운 실험(국제학술지 ‘사회심리학’, 2012)을 했다. 빵 굽는 냄새가 가득한 빵집 앞과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옷가게 앞에서였다. 행인을 가장한 연구진이 이 두 장소를 지나가며 떨어뜨린 지갑·장갑 같은 물건을 주워 누가 더 많이 ‘주인’에게 찾아주는지를 관찰한 것. 그 결과 빵집 앞에서 물건을 주워 갖다준 사람은 77%, 옷가게 앞에서는 52%였다. 이승윤 교수는 “‘남을 도울 것인가’에 대한 의사 결정에 향기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재방문’ ‘제품 구매’ 여부를 결정할 때도 냄새가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해줘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향기가 한 공간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특정 향기가 불쾌했던 사람에겐 그 공간으로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수 있기 때문.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향기를 만들 때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순 없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향기 마케팅 컨설팅 기업인 센트온의 유정연 대표는 “시그니처 향을 만들 땐 다수가 좋아하고 독창적이지만 낯설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에 맞는 향료를 준비해야 ‘향기 마케팅’에 성공할 수 있다. 국내 한 패션 잡지에서 2016년 독자 579명에게 좋아하는 향기가 무엇인지를 조사했다.

여성 10명 중 3명이 묵직한 것보다 가볍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플로랄 계열’의 향을 가장 선호했다. 인생에서 첫 번째, 두 번째로 구입한 향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도 ‘플로랄’ 향이라고 답한 여성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시트러스 향(20.4%), 머스크 향(18.5%), 우디 향(14%), 프루트 향(10.5%)이 그 뒤를 이었다. 남성도 시원하고 청량한 향을 좋아하는 여성의 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이 가장 좋아하는 향은 상큼한 시트러스 향(33.4%)이고 그다음으로 우디 향(19.2%), 머스크 향(17.4%), 아쿠아 향(13%) 순이었다. 실제로도 판매율이 가장 높은 남자 향수는 프레시·시트러스·아쿠아 계열의 향이다. 하지만 문화가 다양해짐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좋아하는 향의 경계가 조금씩 모호해지고 있다.

향을 만날 수 있는 공간 

호텔
숲속에서 잠든 것처럼

전 세계의 ‘포시즌스 호텔’은 지점마다 향기가 다르다. 서울 당주동(새문안로)의 ‘포시즌스 호텔 서울’은 도시의 활기찬 에너지를 담았다. 윤소윤 포시즌스 호텔 서울 홍보팀장은 “시원하고 상쾌한 숲 향의 시더우드 향에 따뜻한 샌들우드 향, 상큼한 시트러스 향을 섞어 세련된 느낌을 줬다”고 설명했다. 서울 소공동의 호텔 ‘더플라자’는 2010년 이탈리아의 건축 디자이너 귀도 치옴피가 인테리어를 맡아 새 단장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향도 직접 만들었다. 유칼립투스 잎의 향을 담은 시그니처 향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같은 향의 디퓨저는 입고되자마자 완판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숲이 떠오르는 향을 풍겨 투숙객에게 편안함을 주는 호텔도 있다. 서울 양재동의 ‘더케이호텔 서울’은 외국인 투숙객을 겨냥해 지리산의 숲 향을 담은 ‘포레스트 오브 산청’ 향을 낸다. 서울 신천동의 ‘시그니엘 서울’은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산책하는 듯한 ‘워크 인 더 우드’ 향을 사용한다. 서울 삼성동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선 숲속의 봄꽃을 연상시키는 ‘아침 이슬’ 향을, 제주 서귀포시의 ‘하얏트 리젠시 제주’는 은은한 난초·대나무 향의 ‘골든 밤부’ 향을, 서울 소공동의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은 꽃의 향기가 조화를 이루는 ‘화이트 티 앤 타임’ 향이 물씬 풍긴다.

몰·테마파크
상쾌한 기분 샘솟도록
서울 동대문 현대시티아울렛의 명화 테마파크 ‘라뜰리에’는 전시관마다 각기 다른 향기를 풍긴다. ‘베이커리 부엌’에선 갓 구운 빵 냄새인 ‘포카치아’ 향, ‘화가의 아뜰리에’에서는 물감 냄새가 나는 ‘워터컬러’ 향이 난다. 또 ‘모네의 정원’에선 연못 정취를 자아내는 ‘오리엔탈 로터스’ 향과 ‘레인 포레스트’ 향이 동시에 풍긴다. 상큼한‘밤의 카페테라스’에선 위스키·와인의 향을 품은 ‘미드나잇 인 파리’ 향이 노천카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인 몰(복합쇼핑 문화공간)에서도 향기 마케팅이 한창이다.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파르나스 몰’은 ‘아말피 코스트’ 향으로 공간을 채운다. 세계 7대 비경으로 꼽힌 이탈리아의 아말피 해변을 담은 향이다. 드라마 ‘미생’ 촬영지인 서울 남대문로의 ‘서울스퀘어몰’은 로비와 사무실에 청량한 ‘아쿠아 웨이브’ 향과 ‘머스크(사향)’를 섞은 ‘화이트 페탈’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긴장감을 풀어준다.

영화관
행복한 기억 오래 남게
메가박스는 지난달부터 프리미엄 상영관 ‘더 부티크’에서 시그니처 향을 풍겨낸다. 프랑스 리비에라 해변의 풍광을 떠오르게 하는 ‘가든 오브 더 부티크’ 향이다. 향긋한 시트러스 향과 따뜻한 스파이시 향에 럭셔리하면서 묵직한 우디 향으로 깊이를 더했다. 여기에 고혹적인 오리엔탈 잔향으로 향기를 오래 지속시킨다. 고혜경 메가박스 운영팀장은 “좋은 향기를 맡으며 휴식을 취하듯 영화를 보고 그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다시 영화관을 찾도록 유도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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