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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볼 일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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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4)

시골 살 때 군에서 지원해 준 토종병아리 50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시골 살 때 군에서 지원해 준 토종병아리 50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시골 살던 때의 이야기이다. 군에서 토종병아리 50마리를 지원하니 신청하라고 방송을 했다. 이날을 준비해 미리 마련한 닭장엔 오리와 기러기, 토끼 두 마리가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고 울타리 밖에도 염소, 개, 흙돼지가 넓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었다.

사업을 접고 건강을 위해 시골에 들어온 남편은 만들고 싶던 동물 농장의 모습이 갖춰지자 흐뭇해했다. 병아리 50마리가 들어와 동물 대장이 된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둘러보며 동물과 대화하는 걸 나와의 대화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순회를 하고 오더니 대뜸 나에게 물었다. (참고로 남편은 혈관성 치매 판정도 받았다. 본인 말로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금방 하던 일, 가던 길 등 모든 행동을 잠시 다 잊는다)

"우리 병아리 몇 마리 갖고 왔나?"

"50마리지."

"자꾸 줄어든다."

"죽었으면 신고해야 하는데? 보상해 준다잖아."

조류인플루엔자(AI) 때문에 병아리 한 마리만 죽어도 신고하면 보상과 함께 매몰 처리해주는 데다 하도 이것저것 정신없으니 그 핑계로 일거리 한 가지 줄이자는 속셈으로 말하니 남편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사라져간다"고 한다. 종종거리며 몰려다니던 그놈들이 혹시 큰놈들에게 치여 죽을까봐 따로 집도 만들어 놓았는데, 어디로 사라진다는 말인가? "나는 농사일 전담이고 당신은 동물농장 전담이니 잘 지켜보소"라고 말해줬다.

병아리 떼죽음 사건에 이성 잃은 남편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밭을 매고 있는 나에게 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 사라졌다." 남편의 치매 진행 속도도 늦출 겸 별 기대 없이 만든 동물농장이었다. 날마다 염소는 울타리를 넘고 돼지는 가출소동을 벌이지만 그나마 오후가 되면 모두 돌아와 집에서 자는 착한 놈들이다. 그런데도 병아리들이 털도 없이 조용히 모두 사라졌다니 '대략 난감'이 이런 상황에 쓰는 말 같다. 웃음이 '헉' 하고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너무 허전해 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야간에 보초 설 일은 아닌지라 한밤중에 후레쉬를 들고 닭장에 들어가 보니 다 사라졌다는 병아리 10여 마리가 남아 한쪽 구석에서 숨은 듯 몰려있었다.

병아리들을 노리던 족제비를 닭장 주변에서 기다리다 몽둥이질로 쫓아낸 남편.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병아리들을 노리던 족제비를 닭장 주변에서 기다리다 몽둥이질로 쫓아낸 남편.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문을 열고 나오는데 팔뚝만 한 동물 한 마리가 휙~하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길쭉한 놈의 노란 털이 너무 선명했는데,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족제비란다. 그날 밤 남편은 닭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새벽녘 몰래 숨어들어온 족제비에게 호되게 몽둥이찜질을 하자 혼비백산 달아났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후론 나타나지 않았다.

한 마리를 처치하고 돌아서는데 1m가 넘을 뱀이 휘~익 지나간다. 화가 난 남편은 이번에도 뱀을 추격해 혼쭐을 냈다.

농장 식구들이 대장의 서슬에 놀라 모두 눈치껏 빌빌거리며 지나가는데 어리숙한 오리가 꽥꽥거리며 뒤뚱뒤뚱 지나갔다. 남편이 오리의 날갯죽지를 휙 낚아채며 잡고는 말했다. “이놈도 귀양이다.” 이것이 텃세를 부리는 바람에 어린 병아리들이 기가 죽어 잘 크지도 못하고 족제비에게 모두 잡혀먹혔다는 것이다. “어휴~ 히틀러도 아니고 죄 없는 동물이 모두 귀양을 떠나네." 어쨌거나 대장의 선고이니 곧 우리 밥상에 오리 로스로 올라갈 것이다.

알을 낳은 오리는 나의 마음 씀씀이 덕에 화 면해 

죽음을 앞두고 있던 오리. 알을 낳은 모습에 남편에게 용서를 받았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죽음을 앞두고 있던 오리. 알을 낳은 모습에 남편에게 용서를 받았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종일 닭장을 오르내렸으니 오늘은 쉬고 내일 잡자고 설득해 오리는 커다란 광주리 독방에 갇혔다. 그렇게 오리는 대장 부인의 마음 씀씀이에 하루를 더 살게 됐다. 다음 날 아침 닭장을 향하던 남편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야~ 오리 풀어줬다. 잡지 마라." 남편 뒤를 따라 밭으로 향하며 큰소리로 물었다. "왜?" "하하하. 그놈이 죽는 날까지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내가 용서해줬다."

남편이 아침에 광주리를 여니 오리가 알을 하나 낳았다는 것이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처럼 삶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고 볼 일이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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