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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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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 노동 현안 중 최대 이슈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가 드디어 노사정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번 논의에 대해 많은 국민은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처리돼 향후 우리 노사관계가 한 단계 발전하는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 노사 간의 견해가 너무나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비정규직 문제를 보는 노동계의 시각도 이성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정치적.감성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는 경영계만의 걱정은 아닐 것이다.

경영계가 정부 입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한 점과 관련해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노동계는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 경영계에 유리하다고 주장하지만 경영계는 정부안이 좋아서 찬성한 것은 아니다. 실제 법안 내용을 보면 파견 대상과 기간을 확대한 것 외에는 기업에 유리한 점이 전혀 없고 대부분 부담만 늘리는 내용으로 돼 있다.

차별을 금지하고 이를 구제하는 절차를 명문화한 것이나 계약 기간 중 해고를 제한하고 3년 이상 계속 고용시 고용의무를 부과하는 등 기업에 인건비 부담과 인력 운용의 경직성이라는 이중의 짐을 떠넘기고 있다. 경영계는 논의 지속의 실익이 없고 산업현장의 노사 갈등을 조속히 해소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의 정부 입법안이 더욱 개악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정부 법안의 원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지금의 정부 입법안을 폐기하고 현행대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정규직에 대한 유연성 확보에 제도적 보완이 배제돼 있는 등 경제현실을 넘어선 정도의 부담을 주는 법안을 경영계가 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분명한 사실 하나는 노동계의 주장처럼 정부 법안이 비정규직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노동계는 자신들의 요구가 모두 반영되지 못한 실망감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기존의 운동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또 하나의 투쟁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문제를 양극화 및 빈곤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정부 법안이 통과될 경우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고 근로자의 빈곤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규직 노조에서 바라보는 시각일 뿐이다. 비정규직 법안의 제.개정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 노동시장에는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수 또한 갈수록 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 노동법이 정규직을 위주로 제정돼 있어 비정규 근로자들은 상대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감안할 때 노동조합의 강력한 보호 밖에 놓여 있는 비정규 근로자들을 위해서라도 정부 입법안은 조속히 통과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노동시장에는 실업자가 100만 명을 육박하고 있다. 현재의 기업환경과 노동법 하에서 이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려는 기업은 많지 않으며, 정작 빈곤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계층 또한 바로 이들이다. 물론 노동계가 주장하는 대로 기업들이 모든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정규직 보호 중심의 법체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향후 논의 과정에서 노동계가 과욕을 부려 이미 고용돼 있는 근로자들마저 노동시장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부르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 더 이상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송세월만 할 수는 없다. 이번에 정부가 제출한 비정규직 법안의 근본 취지는 보다 많은 사람이 일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고 비정규직 근로자를 진정으로 보호하는 데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하고 결론지어야 할 때다.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