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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금융산책]저물가에 발목 잡힌 이주열 2기 … ‘물가 집착’ 벗어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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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서울 중구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전체회의에 앞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변선구 기자]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서울 중구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전체회의에 앞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변선구 기자]

“성장과 물가 간의 관계 변화, 금융안정에 관한 중앙은행 역할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물가안정목표제의 효율적 운영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책 운영체계나 수단을 재검토해야 한다.”

한·미 금리역전, 자본유출 우려에도 #물가 안 올라 금리 인상 어려울 듯 #실업률 하락 → 물가 상승 공식 깨져 #각국 중앙은행, 새 통화정책 고민 #이 총재 “효율적 방안 검토” 취임사 #정책 운영체계 변화 가능성 내비쳐

지난 2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취임사다. 정제된 화법이지만 이를 해석하면 물가가 오르지 않아 통화정책의 수단이 제한되기 때문에 물가에 대한 관점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넓게 보면 당장 물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기준금리를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최종 목표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한은법에 따르면 한은의 목표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문제는 지금처럼 금리 인상의 필요성이 커지는 데 물가가 오르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는 연 1.5~1.75%다. 한국의 기준금리(1.5%)보다 높다.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더욱이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 11일(현지시간) 공개된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을 보면 미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으로 금리 인상 경로가 가팔라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한국 기준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한국에 투자된 외국 자본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물가가 뛰지 않으니 한국은행의 고민은 깊어진다. 이런 고민은 12일 열린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은은 이날 ‘2018년 경제전망(수정치)’를 발표하면서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1.6%로 잡았다. 이전 예상치보다 0.1%포인트 낮췄다.

한은의 물가안정목표치는 2%다. 전망치가 목표치에 못 미친다. 물가가 낮으니 한은의 금리 인상이 당분간 요원해 보이는 이유다.

이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물가만 보면 기준금리 인상이 어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금리 정책을 펼 때 지금의 물가가 아니라 향후 물가를 보게 된다.

목표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금리를 결정할 때는 현재 물가보다는 장래의 물가, 예를 들면 1년 후의 물가가 더 우선한다.”

당장은 금리 인상이 쉽지 않지만 향후 물가의 흐름을 예측해 금리를 조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물가는 중앙은행이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었다.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다. 김동원 SK증권 연구원은 "물가가 출렁대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물가가 급등락하면 자원 배분이 왜곡될 수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손익이 뒤바뀔 수 있다. 투자와 소비를 꺼리게 되는 등 경제 활동도 위축될 수 있다. 중앙은행이 통화량 조절을 통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경기 변동 폭을 최소화해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가 저물가의 덫에 빠지면서 이 나침반이 고장났다. 이를 설명하는 게 ‘필립스 곡선’의 붕괴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의 반비례 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 곡선은 통화 정책의 중요한 이론이었다.

경기가 개선돼 실업률이 떨어지고 인플레이션 기대감이 커지면서 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늘고 결국 물가가 오르게 된다. 이는 통화당국인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미국 등에서 경기가 나아지고 실업률이 떨어져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노동생산성 둔화와 인구 고령화에 따른 고용과 임금 관계 약화 등 구조적 요인으로 경제성장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계약직 혹은 임시직으로 인력을 고용하는 긱(Gig) 이코노미 등장에 따른 근로 행태의 변화도 저물가의 원인이다. 전자상거래로 인한 유통 비용 절감 등으로 소비재 가격이 떨어지는 ‘아마존 효과’ 등도 물가를 끌어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각국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새로운 통화정책

각국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새로운 통화정책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난파될 위기에 구한 세계 경제를 구해내기 위해 주요국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은 12조 달러가 넘는다. 시장에 풀린 유동성은 자산 시장을 달구고 있다. 시장이 과열 기미를 보일 때 중앙은행이 금리를 선제적으로 올릴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이 긴축으로 전환하는 걸 저울질하는 이유다.

하지만 물가가 요지부동이 되자 각국 중앙은행은 혼란에 빠졌다. 긴축으로 돌아설 명분이 약해져서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돈줄을 죄고 푸는 기준(목표)을 바꾸자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낡은 옷을 대체할 새 통화 정책은 여럿이다. 우선 기존의 물가 안정 목표치를 높이자는 것이다. 예컨대 Fed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연 2%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물가 안정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연 3~4%로 높이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높아진다. 물가가 올라갈 여지가 커지는 셈이다.

물가 범위 목표제도 거론된다. 중앙은행의 물가 목표치를 단일 숫자가 아닌 범위로 정해 통화량을 조절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물가 목표치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벤 버냉키 전 Fed 의장이 주장하는 물가지수 목표제도 대안으로 꼽힌다. 물가지수 상승률이 아닌 물가지수를 목표로 정해 통화 정책을 조정하는 것이다.

물가가 아닌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목표치로 정해 통화 정책을 펼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라지브 라완 조지아주립대 디렉터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골을 넣기 힘드니 골대의 위치를 바꾸겠다는 셈”이라고 말했다.

임기 2라운드를 시작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골대를 움직이려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의 낡은 옷(물가)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거함을 바다로 띄운 이주열 총재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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