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종갓집 맏며느리의 '48번째 추석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추석을 일주일 앞둔 지난 4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56칸 집 오류헌(五柳軒). 이 집의 안주인 박수갑(朴洙甲.68)씨는 고방에 넣어뒀던 놋제기 일습을 안채 마루에 내놓았다. 의성 김씨 지촌(芝村)파 목와(木窩) 원중(遠重)선생의 12대손 종부(宗婦) 인 그의 추석맞이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골물해도(힘들고 어려워도) 추석 때면 수십명씩 득실댈 때가 안 좋았니껴."

스무살에 시집와 올해로 48년째.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종갓집 큰 살림을 도맡아 온 朴씨다.

"옛날에는 한달 전부터 추석 준비하느라 진짜 안 바빴니껴. 나이가 들어 힘들제 요즘에사 이거(이것) 저거(저것) 다 줄이고 뭐 준비할 게 있니껴."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일도 아니다"고 말하지만 종갓집의 추석 준비는 도시의 인스턴트식 명절맞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집 청소는 朴씨의 본격적인 추석 준비다. 3백여년 전 건립돼 중요민속자료 184호로 지정된 오류헌은 안채.사랑채.방앗간채 등 5채의 기와집에 방과 마루만 해도 33칸이나 된다. 서울 사는 동생 가족과 아들 형제 식구, 인척들이 몰려와 방마다 차지하기 때문에 걸레질이라도 해 놓으려면 하루가 부족하다. 건축가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통나무를 깎아 새긴 문창살이나 집안 곳곳에 있는 유물들도 朴씨의 손길이 가야 제 멋을 되찾는다.

추석 사흘 전쯤엔 안동 시내로 나가 장을 본다. 옛날에는 열흘 전부터 여러 차례 장을 봐다 날랐다. 유달리 양반 명문가가 많은 안동지역에서도 朴씨의 시댁은 손꼽히는 종갓집. 가세가 넉넉한 데다 인심도 후해 손님 상을 떡 벌어지게 차렸다.

술안주상엔 산적.꼬치.마른안주 등이 올랐다. 다과상엔 과일.떡.붉은 식혜 등에다 최근 찾는 사람이 많아 커피를 새 메뉴로 첨가했다. 대대로 솜씨 좋기로 소문난 이 댁 안주인의 대물림 음식은 고춧가루.무.땅콩.잣.밤.고두밥 등이 들어간 붉은 식혜. 큰 항아리에 가득해도 금방 동이 났다. 최근 몇 년 사이 식객이 많이 줄었지만 불과 5~6년 전만 해도 추석날 하루 동안 손님 상을 차리면서 여든번까지 세봤단다.

그래도 몇 년 전부터는 방앗간에서 떡을 주문해 그나마 현대화(?)시켰다. 예전엔 일꾼들이 집에서 쌀 한 가마니를 방아 찧어 떡시루에 쪄냈다.

朴씨댁은 추석날 성묘를 가는 13위의 산소마다 성묘 음식을 다 따로 차린다. 길이 50cm가 넘는 커다란 방어를 사다가 일일이 포를 떠 꼬치를 만들고 쇠고기 꼬치도 준비한다. 갖가지 과일에다 떡.포.술.향 등도 챙겨야 한다. 이렇게 준비된 성묘 음식은 추석 날 새벽에 朴씨가 일일이 대바구니에 담아 이름표를 써붙인다. 요즘엔 대바구니를 옮길 장정이 부족해 성묘 때 사용할 제기를 간소하게 줄였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근의 명문가도 10년 전부터 과일과 포만을 성묘 때 올린다고 해, 손도 까딱 않는 '양반' 남편 김원택(金源宅.67)씨도 올부터는 꼬치를 줄여볼까 고려 중이다. 그래도 朴씨는 준비해야 할 첫째 추석음식으로 이것을 꼽았다.

"며느리가 둘 있어도 추석 전날 저녁 늦게나 오니 손님이제 어디 일이나 할 수 있니껴? 그래도 저거는(며느리들은) 스트레스 받을게시더."

불어난 식구들 먹일 김치는 미리 담가둬도 반찬인 나물.적.국 등은 추석 전날 준비해야 하니 구부정해진 허리 한번 제대로 펴기도 힘들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손을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나 둘씩 이사를 가는 바람에 올해는 걱정이다.

도시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을 전하니 웬만한 일엔 꿈쩍도 않던 종부 朴씨도 대뜸 "일이 징그럽고 명절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대번에 동의했다. 빈혈도 있고 지병인 신우염 때문에 명절을 치르고 나면 며칠씩 몸살을 앓는다며 "그나마 서울 사는 아(아이)들이 오니까 좋다"고 한다.

"며느리들이 명절 치르고 이 집 간수하겠니껴?" 여든여섯살의 시어머니와 영감님이 있으니 당분간은 명절을 준비하겠다는 朴씨.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이 명문가 종부의 고단함 속의 연륜을 대변하고 있었다.

안동=문경란 여성전문기자 <moonk21@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