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현 <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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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계간지들이 복간되면서 좋은 시들을 많이 읽을수 있게 되었다. 일반잡지에서 잘 다루지 않는 시인들의 시들이 한꺼번에 발표되고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잡지 편집인들의 비판적시선을 의식하고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아졌기때문이기도하다. 좋은 잡지란 거기에 글을 쓰는 필자들로 하여금 잡지 편집인의 시선을 강렬하게 느끼게하는 잡지다. 그 시선이 하나의 잡지를「의사소통의 도구」로 만든다.
계간지들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란「외침」과 「이야기」사이에 있는 장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개인적인 감정의 외침이 한 극단이라면, 그 감정을 객관화시키기위해 그 감정을 낳은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또 다른 극단이다. 예를들어 김지하의「겨울 거울」(창비)이 한 극단에 서있고, 최두석의「동두천 민들레」(문사)가 한 극단에 서있으며, 그사이에 김정란의 「화장」(문사), 정현종의 「자장가」(외국문학), 마종기의 「외로운 아들」(문사), 이재무의 「긔갑기」(외국문학), 송기원의 「살붙이」「숫처녀」(창비)같은 시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시들중의 어느 것만이 방법론적으로 옳고, 정감적으로 납득할만 하다고 주장할수는 없고 그 시들은 다 저마다 제 값어치를 갖고있다. 특이한것은 김지하의 경우인데 그는 때로는 외침에, 때로는 이야기에 달라붙어, 그 두 극단을 동시에 실험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감정이 북받쳐 외침을 향하고, 외치다보면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해져 감정에 의미를 주기 위해 이야기를 향한다. 그의 시인됨은 그 어느 한 극단을 포기하거나, 그 두 극단의 중용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지않는데 있다.
최두석·정현종·마종기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않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더깊이 파고있다. 김정란은 자의식의 과잉을 시적 주제로 삼고있는데, 그시들이 살아있는 것은 「나는 화장하는 두부다」라든지「나는 밥풀딱지같이 세계라는 밥그릇의 가두리에 붙어있다」라는 이미지들 때문이다. 이재무는 유년시절의 배고픔이라는 주제로 서너편의 산문시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백석의 영향때문인지, 그의 시의 필연적흐름때문인지는 잘 알수없다.
송기원의 시는 창녀의 다 닳아빠진 삶속에 서정적 새로움이 감춰져있다는 놀라운 인식위에 씌어진 것들인데, 늙은 창녀의 사실이 천하지않고 구수하다.
그런 창녀를 만나면 하룻밤쯤 이야기로 지새워도 괜찮겠다. 닳아빠진 삶이란 얼마나 지쳐 나자빠진 삶인데, 거기서 서정성을 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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