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은 낡아도 최고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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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그의 호주머니에서 낡은 명함지갑이 나왔다. 세월의 때가 묻어 있을 뿐, 여느 지갑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값을 물어보니 빙그레 웃는다."55만원 입니다." 입이 딱 벌어졌지만, 그는 '당연한데 뭘…'하는 듯한 미소띤 표정이다.

올해는 에르메스코리아 전형선(48.사진) 사장이 부임한 지 꼬박 10년이 되는 해다. 이 명함지갑은 7년 전 받은 생일선물이다. 직원들이 돈을 모아 해 준 것이어서 그런지 에르메스 제품이다. 깜빡 해서 세탁기에도 두 번 들어갔다 나왔고, 잃어버렸다가 어렵사리 되찾기도 했다. 이 선물을 받은 뒤부터 그의 머리에는 명함지갑이란 게 없다. "아무리 좋은 지갑을 봐도 눈길조차 안가더라고요. 이게 최고인데 왜 다른 걸 생각합니까."

섬유수출 사업을 하면서 외국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오는 일을 하던 전 사장에게 1996년 프랑스 에르메스 본사에서 한국지사 초대 대표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워낙 명품 브랜드여서 누구도 선뜻 맡기를 주저하던 자리였다. 그는 10년 안에 연 매출 300억원만 올리면 성공일 거라고 생각하고 대표직을 맡았다. 이후 다행스레 명품 선호 붐이 일면서 8년 만에 목표치를 앞당겨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363억6000만원. 전체 직원 수가 58명이니까 한사람 당 6억2000만원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명품 장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때 회사에 대한 국세청 세무조사가 몰아닥쳤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담당 공무원의 연락처를 알아낸 뒤 무작정 찾아갔다. 그리고는 편견을 갖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처음엔 좀 의외라는 표정의 담당 직원은 얼마 있다 그가 보는 앞에서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선입견을 갖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관리가 지금의 이주성 국세청장이다. 지난해 전 사장은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법이 정한 대로 세금을 내고, 이익을 대부분 한국에 재투자한 게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에르메스의 양적 성장은 일차 목표가 아니다. 에르메스를 하나의 문화로 인식시키는 데 주력한다고 했다. 2000년부터'에르메스코리아 미술상'을 만들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 왔다. 2001년부터'부산 국제영화제'를 후원하고 있다. 특히 매년 주최하는 한국영화회고전에선 초청 감독에게 에르메스 5대 회장의 부인 르다 뒤마가 직접 디자인한 영화감독용 '삐빠(Pippa)의자'를 부상으로 준다. 해당 감독의 이름을 새긴 시가 1000만원짜리 상품이다.

전 사장은 "에르메스 본사가 세계 네 번째로 전용매장 빌딩을 서울에 내는 것도 한국의 명품 소비문화가 그동안 많이 성숙했다고 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파리.뉴욕.도쿄에 이은 이 매장은 오는 6월 서울 강남 도산공원 네거리 부근에 문을 연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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