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강함과 약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물이 어떻게 나와요?” 작은 아이가 옆에서 물었다. 아이는 수영복을 다 입고 이제 샤워를 하려던 참이었다. “이걸 누르면 돼.” 나는 손바닥으로 십여초 간 물이 나오는 자폐밸브를 눌러 보여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밸브를 누르고 샤워를 했다. 그때 알았다. 아이에게는 그 장치가 너무 높이 달렸다는 것을. 그리고 너무 무겁다는 것을.

금수저가 흙수저에게 말하는 공정은 기만 #사랑엔 약자와 강자를 뒤집는 역설이 있어

또 생각났다. 한쪽 레인에서 수영을 배우는 아이들. 내 윗가슴까지 오는 물의 깊이는 작은 아이들에게는 키를 넘기는 정도가 된다. 그래서 쉬는 아이들은 수영장 벽에 매달리곤 한다. 도와주는 어른이 없다면 아이들에게 수영장은 사활이 걸린 장소이다.

태어날 때부터 익힌 독일어 앞에서 나의 독일어는 늘 긴장하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유학 시절 얘기다. 그 독일어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좁고 흐릿하고 따라가기에 너무 빨랐다. 내가 한국어로 알고 있는 지식과 성찰은 힘이 없었다. 나는 약자였다. 나의 독일어가 그들의 독일어를 이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에게 농구를 하자면서 페어플레이를 외치는 것은 우습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금수저가 흙수저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공정”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거리에서, 전철에서,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유모차를 미는 여성에게 보도를 양보해 주기도 하고, 간혹 전철에서는 젊은이들이 권해주는 자리에 앉기도 한다. 외국인처럼 보이는 승객들이 있으면 그들의 대화가 어떤 언어인지를 듣는다.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나에게 인사한다. 웃어주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이 일상의 장면들을 강자와 약자의 그림으로 해석해 본다. 가능하다. “나는 전철에서 노약자에 속하지만, 거리의 유모차보다는 강하다. 외국인들 중에는 자신의 언어를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을 강자로 느끼는가의 여부와 관계가 있으리라. 학생들의 인사와 친밀감의 표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머리 숙임일런지 모른다….”

하긴 나는 강자다. 명문 대학을 나왔고 전문직을 갖고 있다. 유학 시절 약자였지만 덕분에 귀국해서는 외국어를 하는 강자가 되었다. 직업이 교수였고 지금도 명예교수다. 서울의 아파트에 살면서 연금도 받는다. 노약자라지만 아는 모임에서는 선배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최근에 그 의미를 더 절실히 느끼는데 남자다.

서양음악에서 강약이 중요해진 것은 바로크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음악에 강약을 f(포르테, 즉 강하게)와 p(피아노, 즉 여리게)로 지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다. 음악에서 강약은 우열과 아무 관계가 없다. 강함이 약함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음악에서 약함이 없으면 강함은 별다른 의미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작곡가들은 강함과 약함을 대비하거나 점점 세게 혹은 점점 여리게 연결하면서 음악을 만든다. p와 f는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작곡가가 만드는 세상이니 음악에서는 p와 f가 사이좋게 공존하지만 수십억 인구가 생존경쟁하면서 만드는 세상은 f의 경쟁이다. 만일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고막을 찢는 끔찍한 음악이리라.

그래도 두 가지 역설이 있다. 사랑은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진다. 어머니는 아이 앞에서 약자가 된다. 사랑은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솔로몬이 아이를 갈라 반씩 나누겠다고 했을 때 사랑이 많은 어머니는 사랑이 없는 어머니에게 굴복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들은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학생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모임에서는 선배 대접을 받는 내가 들으라고 한 말씀 아닌가. 뜨끔하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