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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미투가 불편한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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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호 35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얼마 전 한 남학생이 미투운동에 잔뜩 뿔이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남자들은 여자와 키스하기 전에 주민등록등본이랑 인감증명 다 떼 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겠네. 무서워서 어디 연애나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며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이렇게 미투운동을 심각하게 오해한다면, 미투운동의 진의가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투쟁이 필요할까요. 한국 남자의 평균적 상식과 감수성을 통계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미투운동에 대한 집단적 반감은 이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미투라는 단어만 들어도 불편하신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오늘은 꼭 말하고 싶습니다. 미투는 남성혐오로 인한 집단히스테리가 아니며,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 대한 뒤늦은 복수도 아닙니다. 미투의 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것은 개인적 분노의 때늦은 표출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며 상식과 양심과 존엄이 짓밟히지 않는 사회를 향한 염원입니다. 미투는 자신의 존엄, 즉 사과받고, 이해받으며, 존중받을 권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당신의 그 닫힌 심장을 향해 두드리는 간절한 SOS 신호입니다.

삶의 향기 3/31

삶의 향기 3/31

저는 미투라고 쓰고 ‘나도 당했다’고 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미투 옆에 이렇게 토를 달고 싶습니다. 당신이 아파서, 우리도 아픕니다. 당신이 아프다면,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아프다면, 우리는 당신의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미투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의 공통점은 늘 자기보다는 타인의 불편을 배려하며 살아왔다는 점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편할까 봐,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해온 사람들. 그런 이들의 마음 깊은 곳의 슬픔과 두려움을 알아보는 진정한 솔메이트가 있었다면, 그들은 조금 덜 아팠을 텐데, 조금 덜 외로웠을 텐데. 죽거나, 다치거나, 제대로 된 삶을 포기해버리지 않았을 텐데. 미투는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자기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자아는 세상 풍파에 흔들리며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지만, 내면의 자기는 끝없는 자기발견과 자기치유를 원하지요. 저는 미투운동이 사회적 자아 안에 깊숙이 감추어진 진정한 내면의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투는 억압당한 자들의 저항을 위한 언어이기에, 그 누구도 미투를 악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미투의 공감대가 몇 년만 더 일찍 불붙었다면, 장자연씨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단역배우 자매들의 안타까운 자살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더, 아니 몇십 년만 더 일찍 미투운동이 일어났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언니들과 엄마들과 딸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요.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지요. “악의 승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자가 나서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눈앞에서 성폭력이 벌어지는 데도 선한 자가 나서지 않는 것, 우리 곁에서 딸들과 엄마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데도 좋은 사람들마저 침묵하고 있는 것. 그것이 미투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내심 원하는, 선한 자들의 침묵 아닐까요.

미투, 그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조롱당하거나 가볍게 패러디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단어입니다. 미투, 그것은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된 듯 보여도 여전히 온갖 차별과 갑을관계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호되게 앓고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미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참고 또 참으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의 당당한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눈부신 신호탄입니다. 미투,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존엄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공감의 언어입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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