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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젖먹이 동생 눈앞서 총살…생존자가 말하는 제주4·3

중앙일보

입력

왼쪽부터 홍춘호 할머니, 김명원 할아버지, 김덕선 할아버지. 오원석 기자

왼쪽부터 홍춘호 할머니, 김명원 할아버지, 김덕선 할아버지. 오원석 기자

제주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은 이름만 남았다. 130여가구가 빼곡히 모여 살던 마을은 지난 1948년 11월 15일 벌어진 학살 이후 전소되고 사람의 흔적이 사라졌다.

"그날 태어나서 총소리를 처음 들었어. 막 '펑펑' 소리가 터지고 집안까지 번쩍번쩍했어. 우리 어멍(어머니)은 '아이고 사람 죽었다' 그러고… 그땐 4.3 사건이니 뭐니 아무것도 몰랐지."

팔순 노인이 된 홍춘호(81·여)씨의 11살 기억이다. 동갑이었던 친구는 엉덩이에 죽창을 맞고, 불에 타 목숨을 잃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있는 큰넓궤에 숨었다. 궤는 굴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그는 가족들과 굴 속에서 두 달을 버텼다. 메밀과 조로 만든 묽은 범벅과 돌 틈에 고인 물을 빨아 먹으며 120여명이 살았다.

엊그제처럼 생생한 참극의 기억

제주는 4.3 사건이 일어난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기억을 생생하고 안고 살아간다. 사춘기 소년·소녀였던 생존자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지만 엊그제 일처럼 눈앞에 비극이 펼쳐진다고 했다. 이성과 광기로 점철됐던 비극의 기억. 제주 4.3 사건의 흔적을 더듬어봤다.

지난 2000년 제정된 ‘제주4.3 특별법’은 제주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을 발화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 동안 좌익 무장대와 우익 토벌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양민이 학살당했다.

정확한 희생자 숫자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지난 2003년 발행된 '제주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제주도의 인구감소 자료를 통해 2만5000~3만명이 희생당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홍춘호 할머니가 제주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최초학살터'에서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홍춘호 할머니가 제주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최초학살터'에서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1958년 봄 21살 시절 홍춘호 할머니(오른쪽)가 제주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동생 홍성집(당시 7세)씨와 찍은 사진. 홍 할머니는 58년 겨울 다시 동광리로 시집을 왔다.

1958년 봄 21살 시절 홍춘호 할머니(오른쪽)가 제주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동생 홍성집(당시 7세)씨와 찍은 사진. 홍 할머니는 58년 겨울 다시 동광리로 시집을 왔다.

학자들은 홍씨 가족이 굴로 들어간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 사이 목숨을 잃은 이들이 전체 희생자의 80%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1948년 8월 수립된 뒤 그해 11월부터(11월 17일~12월 31일)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해서다.

"눈 앞에서 총살당한 아버지 지켜봐"  

김명원(85)씨가 기억하는 4.3사건도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친 1948년 11월 6일 이후다. 당시 15살이었던 김씨 가족은 토벌대 습격 직후 피난해 이듬해 1월까지 산속 움막에서 숨어 지냈다. 그는 아버지가 토벌대의 총에 쓰러지는 모습을 봤다고 회상했다.

김명원 할아버지가 제주시 남원읍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서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김명원 할아버지가 제주시 남원읍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서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제주4.3 사건 당시 양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억새와 나무로 움막을 짓고 은신했다. [사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 사건 당시 양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억새와 나무로 움막을 짓고 은신했다. [사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아버지가 식량 구하러 마을에 내려갔었거든. 하필이면 돌아오는 길에 눈이 그쳤어. 토벌대가 발자국 따라서 움막까지 온 다음에는 요란하게 총소리가 나고 수류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지. 한 50m 됐나. 아버지 죽는 걸 우리 눈으로 다 봤지."

그날 김씨 가족은 인근에 있는 의귀초등학교 창고로 끌려와 수용됐다. 김씨는 "한 70~80명 됐나. 다음날 어머니가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생후 20여일이 지난 젖먹이 동생도 그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젖을 물릴 수 없어 굶어 죽은 동생에게는 이름도 없었다.

김씨는 남은 동생들과 함께 살아남은 걸 ‘천운’이라 말했다. 그를 알아본 남원면장이 그와 동생들을 군용 식수차에 숨겨 남원 경찰서로 피난시킨 덕분이다. 그가 나온 다음 날 토벌대는 학교에 구금돼있던 주민 80여명을 모두 총살했다고 한다.

"토벌 다니면서 총 못 쏴본 행정병에게도 너희도 사람 죽여봐야 한다며 총을 쏘게 했어. 사람을 무슨 액젓 담그듯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쐈어. 보복살인이지."

이 시기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산간지역에 있는 양민들은 무장대로 간주됐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9연대장이 48년 10월 포고문을 통해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대한 통행을 막았던 탓이다.

무장대서 도망쳐 토벌대 가담하기도

증오의 광기에는 좌우가 따로 없었다. 좌익 무장대도 증오의 행렬에 가담했다. 무장대에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일부는 경찰이 돼 토벌대가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김명원 할아버지는 제주4.3 사건 당시 토벌대에서 활동했다.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김명원 할아버지는 제주4.3 사건 당시 토벌대에서 활동했다. 제주4.3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원석 기자

제주4.3 사건 당시인 1948년 5월 제주시 농업학교에 주둔한 미59군정중대. 성조기가 걸려 있는 모습. [사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 사건 당시인 1948년 5월 제주시 농업학교에 주둔한 미59군정중대. 성조기가 걸려 있는 모습. [사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우도 출신인 김덕선(90)씨는 제주시 농업학교 만학도였다. 휴교에 들어갔던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돌아가던 1948년 6월 그는 무장대에 붙잡혔다. 인민재판에서 김씨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작은아버지가 경찰이라는 게 이유였다.

사형집행 2시간 전인 오후 4시쯤 토벌대가 무장대를 습격했다. 김씨는 "총살당하나 뛰쳐나가서 죽으나 똑같은 거야. 그 틈에 튀어 나갔다"고 말했다. 토벌대 덕분에 목숨을 건진 그는 이듬해 5월 경찰에 들어가 토벌대가 됐다. 그가 21살 때였다.

김씨는 무장대의 공격으로 동료 경찰 아홉을 잃은 1950년 11월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장대가 불을 질러 현장을 확인하러 떠난 동료가 매복 공격에 당했다.

"경찰 시체가 아홉구가 있는데, 머리가 없었어. 몸만 우선 조천 지서에 옮겨놓고 머리를 찾아 몸에 붙였는데, 몸에 맞는 머리를 제대로 못 찾아준 것 같다. 그게 아직도 후회돼."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지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피해신고를 받아 희생자 1만 2243명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 84%에 해당하는 1만 277명은 토벌대의 손에 희생된 걸로 확인됐다. 좌익 무장대의 손에 죽임을 당한 양민은 1353명(11.1%)으로 집계됐다.

허영선 제주4.3연구소 소장은 "좌우 이념이 없었던 무고한 여성이나 노약자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학살은 제주4.3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며 "국가공권력이 약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으로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라 설명했다.

제주=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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