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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안보 보수의 틀 버리고 개혁·분배 가치도 수용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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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호 03면

[SPECIAL REPORT] 보수의 몰락│보수 논객 - 진보 거두에게 길을 묻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27일 ’보수가 궤멸하고 문재인 정부가 홀로 서 있는 상황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위험한 구조“라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27일 ’보수가 궤멸하고 문재인 정부가 홀로 서 있는 상황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위험한 구조“라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 주창자다. 오른손은 보수, 왼손은 진보, 두 손이 경쟁하면서 국회 안에서 협력과 타협이 이뤄질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최 교수에게 중앙SUNDAY는 지난 27일 보수 몰락 위기의 원인과 개혁 방안을 물었다.

박근혜 탄핵은 보수 퇴행의 절정 #이젠 진보와 민주주의 경쟁할 때 #남북한 평화공존 방안 고민하고 #유럽의 중도 우파처럼 변할 필요 #진보만의 민주주의 상상 안 돼

최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국 보수가 과거처럼 상대의 잘못에 따라 반사이익만을 바라보고, 성장 만능주의와 냉전 반공주의를 고집하고, 관료-재벌-영남으로 연결된 구체제의 복원을 꾀한다면 정치적 소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국가 시스템의 지원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서는 정치적 자립을 해야 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 가치와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합리적 중도 우파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보수의 위기는 어디에서 왔다고 보나.
“한국의 보수는 1960~70년대 산업화를 주도한 국가 관료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 권력과 성장의 과실을 편중해온 경북(TK) 지역이라는 3자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80년대 말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개혁적 사회세력의 도전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패권적 기반이 강했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친 후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했다. 압도적인 권력 자원과 이를 통한 쉬운 집권은 보수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의 부재, 도덕적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지난 19대 대선은 이런 한국 보수의 기나긴 퇴행 과정의 절정에 이른 결과로 이해된다.”
 지난 대선 결과 지역 구도 역시 약화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보수정당은 영남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지역적 투표 블록을 가졌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해체는 이런 구도를 바꿔 놓았다. 영남에서도 경쟁적 정당 체계가 생겼다. 보수정당이 향유해온 우월적 지위가 뚜렷하게 약화했다.”
 그렇다면 보수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보수는 민주주의를 향한 전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촛불 시위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보수 정부가 권위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에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보수는 권위주의적 국가기구를 동원하거나 그것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행사하려는 행태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향후 정치 경쟁에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동안 진보세력은 진보와 보수를 ‘민주 대 반(反)민주’로 정의해 왔는데 민주주의는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런 경쟁에서 진보가 보수보다 우월하다는 보장은 없다. 보수가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성장으로 대변되는 ‘시장 보수’ 논리도 한계가 온 것 같은데.
“보수는 사회 최상층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화 이후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더 이상 양자택일이 될 수 없다. 보수는 과거 분배를 등한시하고 성장만 강조해 왔는데 앞으로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 경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개혁과 분배의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도 그런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터널 효과’라는 것이 있다. 차선을 바꿀 수 없는 터널을 통과할 때 한 차선의 자동차가 다른 차선보다 지체되면 운전자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회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사회 이동과 계층 상승의 기회가 적어지면 박탈감은 훨씬 강해진다. 지난 세대에서 가능했던 성장이 분배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감은 이미 약화됐다. 청년실업 증가,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이 보여 주는 암울한 현실을 경제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발전주의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회복지, 노동 보호, 높은 고용률을 지켜왔다. 한국의 보수가 그런 경제 운영에 더 이상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안보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보수의 안보관에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민주주의하에서도 한국의 보수는 탈냉전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진보·개혁 세력 등 뭐라고 부르든, 이들을 용공·친북·좌경으로 호명함으로써 그들을 손쉽게 다스리려고 했다. 한국 정치에서 숱한 색깔 논쟁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지난 대선 때도 극보수를 대표하는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문재인 정부를 ‘종북(從北) 정권’이라고 호명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런 호명은 진보세력과 진보적 정부에 위해(危害)를 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의 건강한 재건을 논의하고 탐색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보수 자신을 정신적·지적 유아로 만드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나.
“남북 관계에서 보수는 좀 더 평화지향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핵무장한 북한을 남북한의 안정적인 평화공존의 틀 속으로 어떻게 끌어들이느냐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수가 진보에 뒤져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 북한 핵·미사일 개발이 가공할 수준에 이르렀고 잘못 대응하면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반북이냐, 친북이냐는 이분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지금까지의 남북 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대북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보수에 필요하다.”
 오랫동안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강조해 왔는데.
“나는 촛불 시위 이후 보수가 사실상 궤멸되면서 문재인 정부가 홀로 우뚝 서 있는 현 상황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위험한 구조라고 본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세력이 존재하지 않거나, 힘이 일방적으로 불균형된 조건에서 진보만의 건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한 정당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정당 간의 균형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전후 기민당(CDU)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중도 우파 정당들이나 일본 자민당과 같은 온건하고 개혁적인 보수가 정당체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할 때다. 한국도 그래야 사회 전체가 변하고 민주주의가 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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