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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불란서 주택’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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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서울 연남동은 경의선 철길이 숲길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공사가 한창이다. 일명 ‘연트럴 파크’라 불리는 공원 인근의 집들이 카페로, 음식점으로 재단장 중이다. 가가호호 개조해 임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다가구 주택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덩치 큰 ‘불란서 주택’도 리모델링에 나섰다. 불란서(佛蘭西)는 프랑스의 한자 표기어다.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서울 쌍문동 정환이네 집이 불란서 주택(사진)에 속한다. 팔(八)자 형 경사 지붕에, 1~2층 발코니와 콘크리트 난간 등 딱 보면 알만한 모양새다. 정환이네가 복권에 당첨되자마자 바로 이사 갔던 집, 1970년대를 휩쓴 부유한 도시 생활의 상징과도 같았다.

[사진 CJ E&M]

[사진 CJ E&M]

불란서 주택은 프랑스에는 없는 양식이다. 한때 우리 동네 모습을 바꿔놨는데, 누가 처음 디자인했고,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 건축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유령 같은 건축물이 꽤 많다.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공간들이다.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도 마찬가지다. 62년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고 연설한 대로, 좋든 싫든 ‘아파트 단지’라는 생활혁명을 일으킨 이 아파트를 정작 누가 설계했는지 모른다.

이런 ‘건축의 유령’을 쫓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올 5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은 유령 이야기를 한 조각 찾아 보여줄 참이다. 전시 주제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이다. 주인공은 65년 설립된 국영 건축·토목 기술 회사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기공)다. 기공은 건축가 김수근을 필두로 당대의 잘나가는 건축가들의 집합소였다. 오늘날 한국 도시 공간의 틀을 기공에서 만들었다. 한강 고수부지를 만들고, 여의도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며, 세운상가·삼일고가·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 등 당대 개발계획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도 기공을 아는 이가 드물다. 새로 짓는 대신 재사용하는 시대가 왔다는데, 그 대상의 기원조차 모르는 일이 부지기수다.

터의 자취를 알지 못하는 일상,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삶이다. 기억하고 공유해야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 기공 전시가 우리 삶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