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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대중은 유혹해야 한다 … 가르치려 들면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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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대중과 언어의 작동세계

진실은 힘이다. 진실의 적(敵)은 거짓이다. 가장 큰 적은 따로 있다.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은 “진실의 가장 큰 적은 신화”라고 했다. 그의 통찰은 설득력을 갖는다. 조작된 신화는 진실을 비틀어놓으려 한다.

천안함 폭침 8주년 괴담 다시 퍼져 #사건 초 MB정권 “예측 말라”속에 #거짓·음해에 민심 노출된 탓도 #언어의 감수성이 통치 기량이다 #국민은 매력적인 어휘에 갈증 #‘상상력의 처칠’ 무기는 예언 #‘문재인 개헌안’ 이념 논쟁 속에 #명분과 담론으로 여론 침투 #개헌 논쟁, 감성적 요소도 중요

26일로 천안함 폭침 8주년이 됐다. 대전 현충원에서 추모행사가 있었다. 천안함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비감이 서렸다. 괴담이 다시 퍼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재조사 청원이 무더기로 따랐다. 계기는 지난 평창올림픽 폐막일 북한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의 등장이다. 그는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의 지휘자(당시 정찰총국장)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측근들도 그날 현충원을 찾았다. 감옥 속의 MB는 글을 보냈다. “몸은 같이 하지 못해도 여러분의 나라를 위한 희생을 기리는 마음은 언제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김영철의 평창행엔는 문재인 정권의 대승적 결단이 있다. 남북대화의 전기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천안함 괴담 세력은 ‘대승’(大乘)을 악용한다. 그 의도는 역사기록의 왜곡과 재구성이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여러가지다. 8년 전 초기 대응의 미숙함도 있다. 그 시절 MB의 청와대는 “섣부른 예단과 막연한 예측을 하지 말라”고 부탁 했다. 민·관 국제 합동 조사단의 수색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대다수 국민은 청와대의 절제 요청을 따랐다. 하지만 괴담과 음모설이 확산됐다. 좌초설, 기뢰, 미국잠수함과 충돌설이 난무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사 두 달 뒤 증거물이 나왔다. 북한 잠수정의 어뢰 파편이 발견됐다. 그것은 합동조사단의 결정적 성과다. 뉴욕타임스는 그것을 ‘법의학적 증거’라고 했다. 그 것으로 상당부분 민심의 반전(反轉)은 이루어졌다. 괴담 세력은 움찔했다. 보수 우파세력은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기대만큼 여론은 평정되지는 않았다. 일부 국민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 후 음모설은 잠행과 등장을 반복했다. 지금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당시를 복기해본다. 두달 가량 여당(한나라당)은 “예단하지 말라”에 충실했다. 보수우파에 제동이 걸렸다. 그 때문에 여론 무대는 좌파 내부의 급진세력이 차지했다. 그들은 거짓 선동의 기회로 삼았다. 상당수 국민은 그런 엉터리 이야기와 음모설에 노출됐다. 그 과정에서 대중 속에 감성적 선입관이 축적됐다. MB의 청와대는 과학과 이성을 과신했다. 말이 생산하는 감성의 힘을 경시했다.

정권은 처음부터 의심의 화살을 날렸어야 했다. “북한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과학적 증거를 찾고 있다”는 식으로 나갔어야 했다. 그것은 합리적인 의혹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역할 분담이 필요했다. 한나라당이 여론 전쟁을 맡아야 했다. ‘북한 소행’이라는 암시로 괴담의 전염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무기력했다. 웰빙 보수의 한계였다.

그 무렵 MB는 김영삼·전두환 전직 대통령과 만났다. 사건 결과 발표 전이다. MB는 여전히 예측을 피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단정은 과감했다. YS는 “100% 북한 어뢰 때문”이라고 했다. 전두환은 “아웅산 테러 등 경험, 판단에 비춰볼 때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했다. YS는 “재임 중 (87년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를 만나본 적이 있다. 아주 똑똑하더라. 그런데도 북한은 ‘남한 자작극’이라고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다.

통치는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 기량이 권력을 세련되게 만든다. 그 수완이 국정의 추동력을 높인다. 그 속에서 정권의 정체성과 의지가 단련된다. 국민 속 개인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대중 속 개인은 감성적이다. 이념 대결의 공간은 객관과 합리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그 무대에선 대중 심리를 누가 먼저 유혹, 장악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성은 최후의 확인절차다.

단은 통치의 세계다. 어설픈 예단은 피해야 한다. 예측의 남발은 권력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국민 신뢰를 잃는다. 하지만 그것에 의존해야할 때가 있다. 승부사적 지도력의 발휘 순간이다. 국가 간 이념 대결에서 그렇다. 위기관리 상황에서다. 그 때 묵시(黙示)론적 언어가 동원돼야 한다. 그런 말들은 대중에게 공세적 상상력을 공급한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다.

싱가포르 지도자였던 리콴유는 ‘좋은 리더십’를 찾아다녔다. 그가 꼽은 리더십의 핵심 요소는 ‘비범한 상상력’이다. 처칠 전 영국총리의 삶은 상상력의 서사시다. 상상력은 언어로 공급한다. 말은 처칠의 비밀 병기였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맞섰다. 나치의 본격 도발 이전부터 경고를 보냈다. 그는 자신을 “위험스런 미래를 알리는 선지자(prophet)”로 설정했다.(폴 존슨 『처칠』) 그의 경고는 묵시론적 예단으로 포장됐다. 그것은 경륜과 직관에서온다.

처칠의 언어는 매력적인 힘을 발산했다.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국민적 항전 의지는 굳어졌다. 케네디는 이렇게 평가했다.(1963년) “전쟁동안 영국이 홀로 버티던 어두운 날과 실의(失意)의 밤에 처칠은 언어를 동원해 그것을 전선에 보냈다. 백열처럼 빛나는 그의 말은 눈부신 국민적 용기를 만들었다.”

치는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게임이다. 언어로 상대편을 공략한다. 말로 우리 편을 격발시킨다. 국민 통합의 연설에서도 그 흐름을 놓쳐선 안된다. 지도자의 언어는 정치적 감수성을 담아야 한다. 대중은 그런 언어에 목말라 한다. 3김 정치는 자기 언어를 갖고 있었다. 김영삼(YS)은 직설로 자신의 상징성을 구축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식이다. 김대중(DJ) 언어 방식은 절묘한 파격을 추구한다. “시장경제를 지지한다. 하지만 정의 있는 시장경제여야 한다.” ‘정의’라는 단어를 넣어 민심에 영감을 넣었다. 김종필(JP)은 초기에 산업화의 단어를 내놓았다. ‘조국 근대화’ 구절은 새질서를 만들어갔다. 정치 후반에는 언어 자체의 묘미를 부활시켰다.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말년의 언어는 “정치하지 말라”다. 그 말은 미묘한 여운을 가졌다. 그의 비극 후에도 지지자들을 모았다. 이명박 권력은 추락했다. 그는 “재임 중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 금융위기를 맞았지만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하지만 부패혐의로 그 실적은 상처투성이다. MB시대는 이념을 넘어 실용을 외쳤다. 실용의 언어는 위기대처에 익숙하지 않다.

한국 사회는 산전수전을 겪었다. 정치는 소용돌이다. 경제의 격동은 계속된다. 그 속에서 집단 지혜와 경험이 축적됐다. 그 때문에 다수 국민은 어설픈 설명을 싫어한다. 가르치려는 어투의 정치인을 질색한다. 그런 사람들은 유혹해야 한다. 매력적인 정보를 풀어놓아야 한다.

회는 개헌 협상에 들어갔다. 대통령의 발의 절차부터 시끄럽다. 권력분산, 제왕적 대통령제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진다. 큰 쟁점이 있다. 헌법 전문(前文)이다. 지금의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4·19 민주이념이 들어있다. ‘문재인 개헌안’은 4·19를 ‘혁명’으로 표현하고 세 가지 민주화 역사를 추가했다.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 이념을 계승 한다”는 부분이다.

전문 내용은 민주화 위주다. 산업화의 위상은 초라하다. 한국의 현대사 업적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취다. 한국의 국제적 평판과 갈채는 그 덕분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상호 연관돼 있다. 경제에 실패하면 민주화는 망가진다. 지금의 필리핀이 대표적이다. 그 때문에 전문은 심각한 갈등을 예고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해법을 제시한다. “전문에 손대지 말아야한다. 프랑스 헌법 전문에도 프랑스 대혁명을 넣지 않았다. 인권, 자유민주주의 정신으로 충분하다. 개별적인 사건을 명시하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지금의 전문에 담긴 민주화 내용으로 충분하다.”

헌법은 나라의 기본 틀이다. 문대통령의 표현은 명료하다. “헌법은 한 나라의 얼굴이다. 그 나라 국민의 삶과 생각이 담긴 그릇이다.” 헌법 전문은 얼굴 그 자체다. 헌법의 맨 앞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표출한다. 그 말들은 그 시대의 정치적 감수성을 압축한다.

‘문재인 개헌안’은 민주 이념 계승 강화, 노사대등 원칙, 토지공개념, 경제민주화 강화, 지방분권을 넣었다. 자유한국당은 “상투적인 좌파식 공약”이라고 비난한다. 그 개념은 민심 침투력을 갖고 있다. 결집의 전염력도 강하다. 청와대는 이미지적 접근을 중시하는 듯하다. 조국 민정수석은 사흘에 나눠 개헌안을 내놓았다. 단계별 홍보효과를 높이려는 시도일 것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헌법 개정쇼다. 관제 언론을 통해 좌파 시민단체들과 합세해 대한민국을 혼돈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했다.

개헌은 정치 게임으로 바꿨다. 개헌은 시대정신과 역사인식, 가치관의 경쟁이다. 헌법은 최고 규범이다. 우리 사회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재단한다. 그것은 이론과 합리의 세계다. 하지만 그 속에 감성이 파고든다. 개헌 논쟁에서도 대중을 유혹해야 한다. 이성적 설득만으론 낭패를 겪을 것이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