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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국 반도체가 미·중 통상 밀약의 희생양 될 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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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앞에선 통상전쟁, 뒤로는 물밑 협상을 하는 미국과 중국이 애꿎은 한국산 반도체를 흥정 대상에 올렸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에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확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이 미국과 통상 전쟁을 피하려고 한국·대만산 반도체 수입을 줄이고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느냐만 다를 뿐 한국산 반도체가 미·중 밀실협상의 도마에 올라 있다는 점은 똑같이 짚고 있다.

통상협상에서 양국의 관심 품목이 아닌 제3국의 주요 수출품을 거론하는 것은 이례적일 뿐 아니라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미·중이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산’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D램 시장은 삼성전자(45.3%), SK하이닉스(27.8%), 미국 마이크론(22.1%)이 전 세계 시장의 95.1%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수입을 인위적으로 늘린다는 건 곧 한국 반도체를 의도적으로 차별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물론 반도체 공급이 달리는 상황에서 당장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이 끝나고 수요자가 우위에 서게 되면 한국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 반도체는 지난해 한국 수출의 17.4%를 차지한 대표 상품이다. 시장을 거스르는 미·중의 밀약이 반도체 이외의 품목으로 번질 수도 있다. 우리 정부와 업계가 함께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

통상협상이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정글 같은 세계라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무역’이,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창했던 ‘자유무역’이 겨우 이런 것이었나. ‘공정무역’과 ‘자유무역’이 미·중 밀약에서 드러난 반시장 조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두 나라는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