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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의 적들, 모세산 정상서 5500㎞ 대장정 마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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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1일 오전 6시쯤 일출과 함께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봉우리들 사이로 울려퍼진 외침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은 높이 2285m의 모세산(시나이산) 정상에 오른 국제평화단체 '브레이킹 디 아이스'의 다국적.다종교 대원 10여 명은 이 구호를 외치곤 서로 손을 꼭 잡았다. 대원은 팔레스타인 자폭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이스라엘 여성, 레바논전에 참전했다 시리아군의 포로가 됐던 전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 이스라엘군에 친척을 잃은 팔레스타인인, 9.11 테러 때 동료 소방대원 343명을 잃은 미국 뉴욕의 소방대원, 후세인 아들의 대역을 하던 이라크인 등으로 이뤄졌다.

이들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렀다. 종교 간 갈등 해소와 중동 평화를 위해 지난달 6일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사하라 사막 평화 캐러밴'의 마지막 행사였다. 지난 26일간 사막 생활의 고통과 좌절감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이보다는 '해냈다'는 감동이 가슴으로부터 복받쳐 올라왔다.

중동 평화를 위해 뭉친 '브레이킹 디 아이스' 평화 캐러밴 10인의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 인종도, 종교도 달랐지만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우리는 하나'를 외쳤다. 사진은 원정대가 낙타를 타고 이집트의 사막을 횡단하는 모습(사진위). 원정대원과 지원팀이 여행을 시작하기 앞서 요르단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사진아래). [ABACA PRESS=유로포토]

'브레이킹 디 아이스'의 설립자 유대인 헤스켈 나타니엘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독일 베를린에 있는 본부로 돌아가면 한반도 평화행군을 포함한 다음해 행사를 곧바로 기획하고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타니엘은 "10명의 대원은 밤새 얘기를 나누고 부대끼다 서로 입장을 이해하게 됐으며 사랑을 싹 틔웠다"고 밝히고 "올해 행사는 인종.문화.종교 차이로 인한 증오와 미움을 극복하는 새로운 평화 모델을 제시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우리는 평화를 위한 단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동토의 얼음을 깨고 장벽을 부수는 작업은 2007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분쟁 지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우크라이나.미국인으로 이뤄진 '평화 캐러밴' 팀 10명과 스태프 14명은 비록 예정했던 리비아 입국을 못했어도 원래 계획대로 5500km의 사막 횡단을 해냈다. 예루살렘.팔레스타인.요르단.이집트의 사막을 걸었다. 걸을 수 없는 곳은 낙타와 1960년대 제작된 낡은 소방차와 트럭으로 달렸다.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하라 사막과 시나이반도 사막을 횡단하면서 20여 일간 텐트생활을 했다.

좌절도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이집트에서 이웃 리비아로 넘어가 수도 트리폴리에 올리브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21일 밤부터 22일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이집트-리비아 국경에서 펼쳤던 밤샘 입국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랍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국민 세 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리비아의 입장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너무 높았다. 불과 몇m 앞에 리비아 땅을 두고 이들은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섰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시 사막 평화행진을 계속했다. 이집트령 사하라 사막 동부를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으며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31일 시나이반도의 모세산을 함께 올랐다. 10일간 이집트 동.서 광야를 횡단하면서 모세 등 선지자들의 고행을 체험한 것이다.

모세산 정상에서의 공식일정을 모두 끝냈지만 다시 장벽이 높게 서 있음을 느꼈다. 행사 시작 단계에선 허용됐던 이라크인 라티프 야흐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팔레스타인인 무하마드 알라르자의 이스라엘 입국이 31일 거부된 것이다. 나타니엘은 "나의 모국인 이스라엘도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한탄하면서도 "내년에는 세상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자"고 말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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