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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변신과 결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기업 변신은 엄청난 모험과 결단을 요구한다. 밖에서 보면 대단치 않을 수도 있지만 수백억원 또는 수천억원의 투자를 요하는 신규분야에의 진출은 기업의 명운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 경영자들은 기업 변신 내지 신규투자를 결정할 때엔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고심하게 마련이다.
어설픈 변신이나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식으로 했다간 언제 애써 키워온 기업을 송두리째 망가뜨릴지 모르는 모험이 따른다. 그러나 변신은 기업의 생존·발전을 위해 필수과정이고 어쩔 수 없는 도전이다.
그래서 웬만한 기업이면 예외없이 기획실·종합조정실·경영관리실등 갖가지 이름의 참모조직을 만들어 신규사업의 타당성·장래성 등을 정밀 검토한다.
변신의 최종결정은 언제나 최고 경영자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다. 흥과 망의 기로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최고 경영자만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자연히 최고 경영자는 남다른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우물쭈물해서는 무섭게 변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76년 현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맡았을 때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철구조물을 울산에서 만들어 보험도 들지 않고 뗏목 수송작전을 별였던 것이 오늘날 「현대」 의 기초를 다진 정주영 회장의 결단이었다.
쌍룡의 김석원회장은 종합조정실이 마련한 반도체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묵살하고 86년9월 극비리에 동아자동차를 전격 인수했다.
철저한 보안으로 주가가 전혀 미동을 하지 않았고 측근 참모들조차 뒤늦게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오는 8월초에 개장할 투자규모 6천억원의 세계적인 롯데월드도 신격호회장의 장고 끝의 결단에서 이루어진 작품이다.
투자규모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반대의견이 사내에 만만치 않았지만 그룹의 방향을 관광유통으로 끌어가야한다는 판단에서 투자결정을 내렸다.
현대자동차 캐나다 조립공장도 마찬가지 경우다.
캐나다 측이 제시한 입지 퀘벡주 브르몽시는 언어가 불어권인데다 인구 5천명의 소도시여서 기능공을 구하기 힘들고 영하 25∼30도의 추운 날씨에다 주요 부품생산지인 토론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등 불리한 조건을 들어 실무자들은 처음 반대 의견을 폈다. 그러나 정세영회장은 무역마찰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신에서 이역만리에 약3억 달러를 투자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공장은 90년에 완공, 연간 10만대의 생산 규모를 갖추게 된다.
신격호회장은 롯데월드를 구상하기 전 캐나다의 에드먼턴시를 비롯해 스웨덴등 기후조건이 서울과 비슷한 지역의 복합건물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삼성의 고이병철회장은 연초에 「동경구상」을 갖곤 했다. 일본TV의 신년 프로그램을 보면서, 또는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
삼성 계열기업의 3분의2이상이 「동경구상」에 의해 설립될 정도였다.
이같은 최고 경영자의 남다른 노력이 투자결정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다.
특히 삼성반도체통신의 출생과정은 기업 변신의 가장 드러매틱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74년 삼성이 처음 한국반도체를 인수, 반도체에 손댔을 때는 변신이라기보다 경영다각화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무려 7천억원을 쏟아 부었다. 그것도 무려 14년 동안 연속 적자를 기록해오다가 금년에야 비로소 혹자를 처음 기록할 판이다. 사운을 걸고 승부를 벌여온 셈이다.
82년3월 고이병철회장은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20년만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첫 방문지인 휼릿-패커드사에서 최첨단 반도체 공정과정을 지켜본 그는 이어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엄청난 크기의 진공관을 보고 첨단산업의 급속한 발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반도체에 관한 서적을 샅샅이 읽는 한편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일본 반도체 메이커 관계인사를 찾아 기술제공 가능성을 타진했다.
NEC의 「고바야시」(소림)사장은 『지금 연세가 얼마신데 그 고생을 하려느냐』 며 반대의사를 나타냈고 NTT의 「신토」(진등)총재는 『절대로 해야된다』고 찬성했다.
그러던중 일본샤프의 반도체 전문가 「사사키·마사루」(좌주목정)박사를 만나 64KD램등의 기술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러자 일본 통산성이 반발하고 나섰다. 「사사키」씨를 「국적」이라고 표현하면서 『앞으로의 경쟁상대국인 한국에 어떻게 기술을 제공하느냐』 고 나무랐다.
7개월만에 통산성 허가를 받자 이번에는 국내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학기술처를 제외한 나머지 관련 부처가 시기상조란 이유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우여곡절 끝에 기흥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미국을 다녀온지 1년반만인 83년9월의 일이었다.
그후 반도체 가격의 폭락 등으로 삼성반도체통신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삼성전자에 합병되어 삼성그룹의 중핵을 이룰 정도로 성장했다.
요즈음은 없어서 못파는게 국내의 반도체 시장이다. 이처럼 잘됐기에 망정이지 여전히 기업경영이 수렁 속을 헤매고 있었다면 삼성그룹 전체의 암적인 존재가 될 뻔한 경우였다.
이처럼 기업 변신은 어찌 보면 「죽느냐 사느냐」의 엄청난 모험이기도 한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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