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미국식 정치가 안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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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국식 정치'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같은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어 우리나라 정치가 미국과 닮은 점이 많지만 미국식으로 정치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정당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헌법기관이다. 따라서 제도가 잘 마련돼 있다. 중앙당이 상시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지구당 조직도 갖춰져 있다. 게다가 국고보조금도 받는다. 이에 반해 미국 정당은 중앙조직이 있으나마나한 존재이고, 그것도 선거철에나 가동된다.

정당이 헌법기관도 아니며 정치적 편의 때문에 생긴 사적(私的) 결사체에 가깝다. 정당의 후보도 당 조직을 통해 충원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당원의 투표로 선택되며, 당 조직을 통해 조달되는 정치자금은 없다. 한 마디로 후보자에게 정당은 별 도움이 안 된다.

*** 권력 분립 아닌 권력 대치 국면

이렇게 희미한 존재인 정당이 의회로 들어오면 상당한 역할을 한다. 의회조직에서부터 입법과정에 이르기까지 정당 간의 대화와 타협이 제도화돼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대통령의 영향권 밖에서 일어난다.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의원들이 의원 되는 데 대통령이 도와준 것이 별로 없으니(예컨대 돈이나 공천) 의정활동을 하면서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바로 이러한 정치구도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 권력분립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우리 정국을 볼 때 대통령과 의회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여당은 대통령과 엇박자를 치고 있으니 꼭 미국식으로 권력분립이 이뤄진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권력분립이 아니라 권력대치 상태다.

권력분립은 일을 되게 할 수 있지만 권력대치는 남이 하고 싶은 일을 방해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혹자는 소수파 정부 또는 분점 정부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민주화 시대에도 정당의 자리 매김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 비해 법적.제도적으로 월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한국의 정당이 자율성과 기능성의 측면에서 미국에 뒤지고 있는 아이러니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독재하는 것도 아닌데 정당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구태를 하루아침에 벗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맞는 정당정치의 모델이 보이지 않아 더 혼란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후보도 미국식으로 경선에 의해 선출하고 있으니 이참에 중앙당도 축소하고 지구당도 폐지해 미국식으로 확 바꾸면 어떨까?

한 마디로 불가다. 어떤 제도든 수입할 때 세트로 들여오는 것이 부작용도, 혼란도 적은 것이 상례지만 이 문제만은 그렇지 않다. 정치의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어떤 나라에 비길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시민사회'는 그렇게 분화돼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다원적이지도 않다. 정당이 헌법기관이 된 이유는 이러한 문화적 특성과 현실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정당에 거는 기대도 그만큼 특별하다고 보아야 한다.

*** 지역.이념 대표성 융합했으면

자수성가했기에 의원 하나 하나가 독립체인 미국식 정당정치 하고 부자(富者) 아버지를 둬 편하기는 한데 아버지 말씀을 거스르기는 어려운 유럽식 정당정치 사이에 한국적 정당정치의 모델이 있다.

국회의원도 어디 비빌 언덕이 있어야 대통령과 상대할 수 있지 4년마다 한 번씩 목숨(?)을 거는 상황에서 제 정신으로 국정에 임할 수 없다. 미 하원의원의 임기가 2년이라지만 출마만 하면 재선은 90% 이상 확신한다.

사정이 이러니 우리 국회의원은 각자 호신하기에 바빠 국회는 안중에도 없다. 지역대표성과 이념대표성을 융합시키고 자율성과 지향성을 배합하면서, 경쟁하는 엘리트 집단들을 거느리는 정당정치가 한국식 정치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여당 내에서 벌어지는 쟁투가 이러한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기를 바란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제발 몸싸움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중빈 국민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