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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량은 얼씬도 못하는「붉은광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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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모스크바에서 짧은 취재기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찾아간 곳은 붉은 광장이었다. 도착한 다음날 새벽(5월16일), 그 이튿날 저녁 무렵, 그리고 레닌그라드로 떠나던 날(19일)오후등 세번이나 이굿을 취재했다. 첫날에는 사진촬영을, 두번째는 인투리스트 안내원「세르게이」의 설명을, 마지막에는「레닌」묘를 구경했다.

<총면적 2만여평>
붉은 광장은 숙소인 인투리스트 호텔뿐만 아니라 인터액션 카운슬 회의장에서 도보로 7분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또한 이 광장은 인구 2억8천만명의 사회주의 초강대국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를 동서로 양분해온 전공산권의 심장부를 이루는 세계사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볼셰비키와「케렌스키」정권의 백색군대가 최후의 일전을 겨룬 곳이고 러시아혁명은 여기서 볼셰비키의 승리로 결판났었다.
해마다 국제노동절(5월1일)과 러시아혁명기념일(11월7일)에 적군과 노동자들이 장엄한 대행진을 필치는 광장. 특히 작년 5월 서독청년「마티아스·루스트」가 조종하는 세스나 172기가 철통같은 방공망을 뚫고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잠자리처럼 날아와 착륙, 세계의 이복을 집중시켰던 곳도 다름아닌 붉은 광장이었다. 안내원「세르게이」는『붉은 광장과 크렘린을 제대로 보면 모스크바의 60%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붉은 광장은 가장 중요한 취재대상으로 떠올랐다. 15일 아침6시 이 광장을 찾아나섰다. 북에서 남으로 고리키 대로를 따라 내려갔다. 북국의 밤은 짧아 날이 완전히 밝았고 새벽 기온은 차가왔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외투를 걸치고 왕래하고 있다. 고리키 대로가 끝난 곳에서 넓은 광장이 앞을 가로막는다.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광장이다.『레드 스퀘어』라고 물어도 언어물통. 한 신사에게『프라스 루주』라고 불어로 말하니 땅밑으로 가라고 손짓하며 가르쳐 준다.
음침한 지하도를 통과, 지상에 오르니 사진에서 보아 낯익은 스파스카야탑의 시계가 보인다.
붉은 광장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산책중이었다. 총면적 7만3천평방m, 남북의 길이 6백95m, 동서가 평균 1백30m인 이 넓은 광장은 차량 출입이 금지된 보행자의 천국이었다. 로마와 파리처럼 바닥을 돌로 짜만들어 고도의 품위를 갖추고있다.

<본래 아름다운광장>
차르황제의 사형 집행인들이 1671년 반란두목「스텐카·라진」을 처형했고 1698년에는 젊은 차르를 타도, 그의 누이「소피아」를 옹립하러 했던 경호대원들이 사형당했던 역사의 현장.「차이코프스키」로 하여금『1812년서곡』을 작곡하게한「나폴레옹」의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존·리드」가 묘사한바, 1917년 혁명때 남편과 아버지의 전사에 목메어 울며 행진했다던「혁명전사」들의 아내와 딸들의 이야기도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양복 앞에 훈장을 빈틈없이 주렁주렁 단 노인들의 모습이 2차세계대전때 모스크바를 나치 침공으로부터 끝까지 지켜낸 슬라브민족의 용기와 애국심을 엿보게 한다.
붉은 광장은 제정러시아의 고전미와 혁명후 사회주의적 낭만, 그리고 오늘날「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이 혼재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안내원「세르게이」에 따르면 원래 이 광장의 이름은「아름다운 광장」이었다. 크라스나야(krasnaia=아름다운) 라는 옛 러시아어는 러시아혁명후「붉은」으로 바뀌었다.
1917년 10월 혁명군과 반혁명군간의 격전으로 이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다.「레닌」의 지시에 의해 적색은 소련국기의 바탕색이 되었고 1918년 3월부터 적기가 크템린궁 꼭대기에 나부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혁명후 71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 붉은 기는 크렘린의 정부청사 꼭대기에 걸려 있다.

<북한인도 눈에띄어>
크렘린 성벽의 탑 꼭대기에 붉은 별을 단 것은 혁명 20주년인 1937년. 20개의 탑 가운데 가장 높은 5개의 탑에 밤에도 빛나는 적색 루비로 만든 별을 달았다고 한다. 이 별은 높이가 3∼3.5m, 무게가 1∼1.5t짜리로 세계에서 가장 큰 루비 스타다. 크렘린 정문격인 스파스카야탑의 초대형 시계도 명물중의 하나. 검은색 바탕의 이 시계는 직경 6백12㎝, 바늘의 길이 2백97㎝, 무게 25t이다.
이 시계는 혁명때 포격을 받아 부서진 것을「베렌스」라는 시계 제조인이 수리했다고 한다. 1918년 8월 다시 작동한 이 시계는 오늘까지 모스크바방송의 시보로 울러 퍼지고 있다.
스파스카야탑 정면 광장 한가운데에 포크로프스키성당이 우뚝 서있다. 이 성당은 1555∼1561년「이반」대제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왕국 정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 건물은 9개의 작은 성당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러시아 건축양식을 자랑한다.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성당의 높이는 47m, 꼭대기 마늘모양의 첨탑은 순금색이다.「이반」대제는 이 성당을 건축한「포스트닉·이아코브레프」가 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까봐 그의 두눈을 뽑아버렸다는 전설을 남겼다.
광장 동쪽엔 소련 최대의 백화점인 굼 (GUM) 이 있다. 1893년에 완공된 이 백화점에는 혁명전 2백여개의 개인상점들이 있었으나 혁명후 모두 국유화되었다.
총연장 2.5㎞ (창고건물을 합치면 5㎞) 나 되는 3층 건물속에는『소련에서 나는 모든 상품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날마다 약40만명의 고객들이 쇼핑하러 드나든다.「세르게이」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물건 사기가 어렵다. 러시아 인형 1개에 10루블, 러시아 특유의 꽃무늬를 수놓은 스카프가 5∼6루블(약10달러) 선으로 파리의 백화점보다 크게 싼값이다.
오후 5시께 붉은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찼다.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행렬, 소련수병들과 사관생도들의 행렬, 동·서구에서 온 관광객들의 대열, 소련의 지방에서 구경온 가족 단위의 그룹들. 그러나 파리나로마에 그렇게도 많은 일본 관광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일성배지를 단 북한인들을 세번이나 조우했다. 기자는 배지때문에 그들을 쉽게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3∼4명씩 떼지어 떠들며 기자옆을 지나 갔다.「레닌」묘 앞에는 더욱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중 신혼부부들이 묘에 인사하고 꽃을 바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세르게이」는「레닌」묘가 모든 소련인들의 순례지며, 특히 신혼부부들은 반드시 결혼식후 이곳에 들러 인사하고 붉은 광장에서 기념촬영하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그는 소련인들이 차르시대의 몸서리치는 노예생활을 잊지 않으며, 이로부터 해방시켜준「레닌」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어 신혼부부들이 그의 묘에 꽃을 바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자에게는「레닌」을 보지않고 가면 알맹이 없는 취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인투리스트 본사에서 외국인용 패스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내일 낮12시부터 오후1시 사이에 역사박물관 오른쪽에 가면 적군병사들이 레닌묘에 안내할것』이라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청소후 통제풀어>
인터액션회의 취재로 낮12시30분에 도착했다. 적군병사들이 이미 늦었다고 10여명의 소련인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기자는 패스를 보였다. 한 법사가『파스포드』하기에 얼른 한국여권을 보여주었다. 그는 역사박물관 휴대품 보관실로 안내, 기자의 카메라를 보관시켰다. 그리고 붉은 광장쪽 행렬을 가리켰다.
기자는 행렬의 맨끝, 폴란드에서 왔다는 한가족을 따라갔다. 이때 붉은 광장은 이 행렬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이때만은 이 광장의 출입이 통제된다고 한다. 그만큼 소련은 이 묘를 신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드디어 묘 정문앞 2명의 의장병 사이를 지나 문안에 들어섰다. 왼쪽 계단을 23개 내려갔다. 바로 그 오른쪽 방에「레닌」이 잠자는듯 누워 있었다. 그는 크리스틀관 속에 검은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흰바탕에 검은 무늬 넥타이를 맨 모습으로 잠을 깨면 일어날것 같았다. 다리부분은 꽃송이들로 덮여 있었다. 먼저 오른쪽으로 관을 보며 계단에 올라 정면으로 다시 보고, 왼쪽으로 보며 계단을 내려간다음 반대편 문으로 나왔다. 2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행렬은「레닌」묘 뒤를 돌아 크렘린 담을 끼고 스파스카야탑 옆으로 나와 흩어졌다. 이때 10여대의 청소차가 광장을 청소했다. 그리고 통제가 풀렸다. 붉은 광장은 다시 인파로 붐비기 시작했다. 다양한 의상으로 개혁의 열망을 표현하는 군중들의 모습과「레닌」묘가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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