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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꼭둑각시놀음 김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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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남사당은 저들끼리만 통하는 특이한 암호의 말을 잘쓴다. 이른바 변 (은어) 이다. 여러해동안 남사당패와 생활하면서 조사한 심우성씨의 집계에 의하면 무려 8백단어를 헤아린다.
그 숫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톡하게 은어를 발전시킨 심마니 (산삼을 캐는 사람) 말을훨씬 압도하고도 남는다. 반세기 전 손진태씨가 수집한 심마니 특유의 산중용어는 불과 2백 미만이었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저들만의 비밀스런 용어를 갖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뜻이 있다. 저들 내부 세계에 비밀지킬 것이 많다는 것, 외부세계에의 누설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일반 대중과도 격리된 특수 세계임을 뜻한다.
거기에다 변의 수가 많다는 사실은 그런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저변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활동하는 폭이 넓음을 암시한다.
남사당은 특별한 종목을 장기로 삼는 놀이패가 아니다. 서민사회에서 즐길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해서 보여주는게 바로 그들의 장기다. 농악을 치고 탈춤판을 벌이며, 줄타고 맨손으로 땅재주 부리며 막대 끝으로 사발 돌리고 꼭둑각시 놀음도 한다. 참으로 다양한 레퍼터리다.

<7세때 남사당입문>
『일곱살때 남사당 노는걸 보고 짐을 도망나와 좇아나섰지요. 삐리부터 시작해서 3무동·4무동을 겁없이 올라갔고 열살이 돼서야 여복하고 소고를 쳤지요. 그로부터 안해본 것 없읍니다』
천안시내 방죽만 태생인 김재원씨 (65) 는 현재 남사당을 지켜 이끌어가는 유일한 뜬쇠(지휘자격의 원로 상쇠).
현재 남사당단장은 작고한 꼭두쇠 남운용씨의 부인 박계순여사가 맡고 있는 터이지만 풍물의 상쇠를 비롯하여 꼭둑각시놀음의 대잡이에 이르기까지 주된 종목을 두루 해내는 재주꾼은 역시 김씨다.
김씨는 떠돌이 10년만인 17살에 처음으로 고향을 들렀지만 이틀만에 다시 정처없이 떠났다고 했다. 본시 사당패의 행방이란 묘연하게 마련.
집도 처자식도 없는 사람들의 유랑집단이다.「하늘을 지붕 삼고 허리띠로 양식삼아」마을에서 마을로 옮겨다니며 놀이를 팔아서 끼니를 대는 것이다. 그러다가 승낙없이 마을로 들어가 자다가 한밤중에 쫓겨나던 기억을 지금도 생생히 더듬고 있다. 그 숱한 은어 가운데 「기분좋다」「배부르다」와 같은 말은 아예 없는 것이다.
『점심은 보통 안 먹는 것으로 돼 있었지요. 저녁 못 먹는 날도 허다했는걸요. 그래도 구걸해서라도 나는 못먹을지언정 어른을 잘모셔야 했읍니다.』
그런 집단일수록 자치적인 룰이 지엄한 법이다. 만약 잘못을 저질러 꼭 벌주게되면 우선 가열 (어린아이) 이 앞줄에 무릎꿇고 다음줄에 삐리 (무동과 소고) , 뒷줄엔 사물을 꿇어 앉힌다. 그리고 맨 앞쪽에다 죄인을 따로 앉힌뒤 어른들이 상청에 을라앉아 꾸짖어『엎어놓고 되지게 매질한다』고 했다. 벌받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개를 못쳐들고 꿇어앉아 있기만해도 식은 땀이 나는 무서운 가형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한집단에 소속되면 여간해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밖에서는 알수없는 유랑집단의 생리다. 전혀 딴 직업을 택하지 않는한 다른 접단으로 옮기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40∼50명으로 구성>
눈이 덮여 놀이판을 벌일수 없는 계절이 되면 산중사찰로 찾아들었다. 또 어찌어찌 해산했던 식구들이 다시 사당패를 조직할 때에도 으례 사찰이 집합장소가 됐다. 그래서 흔히 안성 용암사, 고양 진관사·보광사, 논산 개심사등이 남사당의 근거지처럼 알려져 있는것이다.
사당을 한자로는 사당·사당으로 적는 까닭에 사찰과 무슨 연관있는 기구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시「사당」이란 한자표기가 없으며 떠돌아다니면서 소리와 춤을 팔고 노는 여자패거리를 가리킨다. 그와 반대로 한두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로 구성되었으니 남사당일 따름.
남사당의 행중은 보통 40∼50명. 꼭두쇠(우두머리) 화주(기획총무) 식화주 (음식담당) 뜬쇠(각 부문의 원로) 등이 어른이고 놀이를 못하게 된 노인은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가열에 속한다. 아이들은 대개 알록달록 여장을시켜 눈길을 모은다.
남사당은 초대되는 놀이패가 아니라 놀 장소를 찾아다니는 공연단이다. 그 놀이판을 얻기 위해 마을에서 잘 보이는 언덕에 짐을 내려놓고 한판 마당을 벌였다. 말하자면 들어가도 좋으냐는 신호다.
한편 화주가 마을로 들어가 교섭해 영기를 동구나무에 매달면 풍물치며 신바람으로 내닫는것이 상례였다.
남사당 놀이의 첫 순서는 말할것도 없이 풍물부터 시작한다. 풍물은 놀이의 기본이요, 그만큼 명수이기 때문에 두레가 났을 때 더러 초대되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일반 농악과 달라서 무동이 특히 장관이다. 3무동은 예사요, 아슬아슬한 5무동도 해낸다.
그 다음이 쳇바퀴에다 가죽 메운 버나 돌리기다. 버나만도 14가지. 사발과 종지돌리기, 멱서리나 삼태기 돌리기에 장죽버나·자새버나·칼끝버나등 다양하다.
접시 복판에 구멍 뚫어놓고 돌리는 서양버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름」이란 어릿광대와 재담을 나누며 줄타는 것을 말한다. 어름사니는 대체로 여성에게 주어진다. 2∼3m 높이의줄위에서 부채 하나를 의지삼아「녹두장군 행차」며「참봉댁 아씨걸음」등 20여가지를 선보인다.

<인형시켜 감정묘사>
「살판」이란 땅재주의 클라이맥스부분. 유사한 연희집단인 쇠때쟁이패의 놀이 중에서 흡수된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데「뒤꼰두」「앞꼰두」「자반뒤지기」「팔걸음」(물구나무서기) 「쑤세미틀기」「앉은뱅이 모말되기」「수몰뛰기」그리고 공중 2화전이「살판」이다.
가면극은「덧보기」라 부른다. 다분히 양주산대놀이의 성격을 띠었으나 서민 취향으로 각색하고 압축시킨 내용이다.
마지막 꼭둑각시놀음은 남사당 용어로「덜미」라 일컫는다. 사람대신 인형을 등장시켜 2마당 7거리의 연극을 보여주는 것이다.「꼭둑각시」는 혼히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위인을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그와 정반대의 큰마누라 (본처)의 대명사다.
현행되는 극중인물의 비중으로 보면 꼭둑각시의 연희는 극히 부분적이고 또 시앗에게 패배 당하고 이무기 (상징적 동물) 에게 물려죽는 미약한 존재다. 오히려「박첨지 놀이」라든가,「홍동지놀이」라 별칭되듯이 박첨지와 홍동지가 시종 극을 주재해 나간다. 특히 시뻘건 알몸에다 양물까지 커다랗게 드러내놓은 홍동지는 멋갈없지만 의로운 고전적 슈퍼맨.
허식을 벗겨버린 인간의 본색이요, 자신들의 상징적 대변자일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자기확대의 소박한 창의에 의하여 만들어낸 인형이요, 유희이기 때문이다.
정작 한국은 장난감으로서의 인형이 없던 나라다. 사람형상의 우상이라면 으례 신앙의 대상이거나 의식에 소용되는 것이어서 인형을 만들어 가지고 놀거나 집안에 두는 것을 금기시하는 관습에 젖어왔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인형 양식은 모두 개화 이후 도입된 외래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전통과는 무관하다. 그 점은 확실히 일본·중국에 있어서의 인형의 유행과 상반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꼭둑각시는 한국문화의 이단아라 할까. 넓게는 동양공통의 인형극 문화권으로 이해되는 것이지만 그 연원을 소급해보면 북쪽변방으로 침투한 호희의 성격을 능히 짐작해봄직하다. 물론 고려때 이미 인형놀이가있었다하므로(지봉유설)조선조후기에 한국나름으로 토착화된 서민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꼭둑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것은 1964년. 제한된 인원을 가지고 여러종목을 서로 몇가지씩 맡아 옴니버스 스타일로 일괄 공연하는 것이 남사당놀이므로 꼭둑각시놀음만 지정할게 아니라 모두 지정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당초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남사당전체가 중요>
물론 6종목을 함께 묶어 지정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꼭둑각시놀음을 제외하고는 지역성이나 남사당 특유의 고유성을 고집할만큼 선명치 못한 점을 부인할수는 없다. 그럼에도 남사당의 흥행성은 여러 놀이종목의 다채로움 때문에 성취되는 것이지, 꼭둑각시놀음만으로는 지탱하기 곤란하다는 사실도 무시할수는 없다.
김재원씨는 해방직후 지방순회에서 대성황을 거두었던 몇 고장의 사례를 지울수 없노라고 했다. 즉 서태안면도에서 몇십리 밤길을 마다 않고 모여들던 사람들, 광목 6통의 포장이 터지도록 관객이 들었던 군산공연, 오징어 철에 동해안을 돌면 가마니로 돈을 담았던 얘기, 오징어를 물통으로 얻어다 먹을 수 있던 것도 즐거운 추억의 한토막이다.
과거의 남사당 재주꾼들은 차근차근 교육해서 전수된게 아니다. 보고 스스로 터득해야만 치열하고 매서운 생존경쟁속에서 살아남도록 돼있었다. 하물며 우두머리 구실을 하려면 열두가지 재주가 다 요긴했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 후진들의 전수받는 태도가 영 못마땅하다.
꼭둑각시놀음 하나만으로는 결국 꼭둑각시 밖에 안되므로 김씨는「민속회 남사당」자체가 활기를 되찾길 바라고 있다. 그 간판이라야 거기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생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글 이종석
(중앙일보 출판기획위원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김 주 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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