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향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소확행' 시대의 N포 세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소공녀'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자신이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소공녀'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자신이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취직하기 위해, 집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하나둘씩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원래의 나는 모두 깎여 나가고 무색무취한 회색 인간만 거기 남아 있다. N포 세대들이 느끼는 서글픈 아이러니다. 전고운 감독(33)의 장편 데뷔작 ‘소공녀’(22일 개봉)는 바로 N포 세대의 고단한 현실을 다룬 영화다.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하루 4만5000원을 버는 서른한 살 미소(이솜 분)는 사랑하는 담배와 하루 한 잔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그는 담뱃값이 두 배로 뛰고 월세마저 오르자, 담배 대신 자취방을 정리하고 머물 곳을 찾아 길을 나선다.

영화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이 될 수 있다는 각오로 하고 싶었던 얘기들로 영화를 채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이 될 수 있다는 각오로 하고 싶었던 얘기들로 영화를 채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개봉을 앞두고 서울 명동에서 만난 전 감독은 자그마한 체구지만, 거침없고 화통했다. 장편 연출은 ‘소공녀’가 처음이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1999, 면회’(2013) ‘족구왕’(2014) ‘범죄의 여왕’(2016) 등 동시대 청춘을 비춘 개성 강한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온 영화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여러 번 각색‧제작에 참여했다.

영화 '소공녀' 전고운 감독 인터뷰

전 감독은 “어릴 땐 제가 미소 같았는데 어느새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더라”며 “텐트 치고 살면 뭐 어때, 좋아하는 거 하겠다며 ‘끝까지 가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로 하고 싶었던 것들로 영화를 채웠다”고 했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소공녀' 한 장면.[사진 CGV아트하우스]

-미소는 주류 한국영화에선 낯선 캐릭터다.  
“남자가 아닌 여자인 데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금기시되는 담배 피우는 여자가 주인공이이어서 그럴 거다. 그래서 배우가 배역 맡기를 꺼리지 않을까, 투자가 될까 걱정이 많았다. 근데 걱정만 하면 어떤 다양한 이야기도 할 수 없겠더라. 용기를 내서 순제작비 2억 원대로 독립영화처럼 찍었다. 배우 이솜씨가 미소 의상을 입고 매니저도 없이 혼자 현장에 출퇴근해 힘이 돼줬다. 첫 만남부터 ‘생얼’로 꾸밈없이 대하더라. 솔직함과 ‘똘기’에 반했다.”

-왜 하필 담배와 위스키였나.
“일종의 상징이다. 다들 어딘가 중독돼 살고 있는데, 담배와 위스키는 유독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성인이 돼야 할 수 있고, 역사와 전통도 길고. 3년 전 담뱃값 인상의 충격도 있었다. 한 번에 2000원씩 오르는 건 물가 대비 말도 안 된다.”

-주인공을 가사도우미로 설정한 이유는.  
“일당직 중 여성이 가장 구하기 쉬운 일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청소에 대한 저의 존경심으로 넣게 됐다.”

광화문시네마 전 작품에 출연한 배우 안재홍(왼쪽)이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 역을 맡았다.[사진 CGV아트하우스]

광화문시네마 전 작품에 출연한 배우 안재홍(왼쪽)이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 역을 맡았다.[사진 CGV아트하우스]

무엇이 되겠다는 꿈 대신 현실의 행복에 야무지고 충실한 미소는 ‘성장’이 미덕이라 믿는 사회 통념을 깨는 캐릭터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小確幸)을 추구하는 요즘 청춘의 심리와도 맞닿아 있다.

전 감독은 “어릴 땐 꿈을 꿔라, 꿈이 중요하다 가르쳐놓고 성인이 되고 보면 정작 꿈꿀 여유를 허락지 않는 이 사회가 저는 너무 이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구조 속에서 왜 굳이 성장해야 할까.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사람 만나고 그런 게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닌가” 반문했다.

미소가 대학 때 밴드 멤버들 집을 찾아가면서 영화는 삭막한 서울의 풍속도 성격을 띤다. 링거액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커리어우먼, 20년 만기 대출로 아파트를 마련했더니 이혼 위기를 맞은 새신랑 등 누군가에게 ‘집’은 족쇄다. 겨울이면 냉골이 돼 성욕조차 얼어붙었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이 “봄에 하자”며 미소를 ‘웃프게’ 안아주던 싸구려 달방이 외려 사람 사는 온기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노총각 선배네 가족이 미소를 며느리‧아내 후보로 대상화하는 에피소드에선 여성 감독의 예리한 시선이 드러난다. 미소를 가장 못마땅해하는 건 가장 부유한 친구 정미(김재화 분)다.

-정미는 가난해도 자신의 취향을 버리지 않는 미소가 ‘염치없다’고 면박한다. 
“위협을 느끼는 거다. 자신은 안락한 삶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힘든데, 미소처럼 사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그게 무서운 것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한테 직접 피해를 안 줘도,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폄훼한다.”

-다름을 존중하는 게 갈수록 왜 힘들어질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인데, 요즘은 아파트에 안 살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집 구조도 다 비슷비슷하다. 획일적인 곳에서 획일적인 것을 원하다 보니 사고가 갇힌다. 다른 것도 보고 살아야 생각이 바뀔 텐데, 다양성이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창작하는 입장에선 더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담배, 남자친구, 하루 한 잔 위스키가 미소에겐 사는 낙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담배, 남자친구, 하루 한 잔 위스키가 미소에겐 사는 낙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전 감독은 경북 울진 출신이다. 중학교 때 사춘기를 ‘격하게’ 겪고 엄격했던 부모님을 벗어나기 위해 기숙사가 있는 포항 명문고에 진학했다. 숨 막히는 학교 규율과 외로움 속에서 그에게 위로가 돼준 게 영화였다. “무슨 영화인지 모르면서 정말 안 가리고 다 봤다. 당시 영화 주간지를 정기구독하며 독학한다고 생각했다. 전교에서 영화과 간 애는 저밖에 없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남편 이요섭 감독(‘범죄의 여왕’) 등 동기들과 문을 연 광화문시네마는 ‘소공녀’를 끝으로 시즌1을 마무리하게 됐다. 미소의 다정한 연인으로 분한 ‘소공녀’까지 광화문시네마 전 작품에 출연한 안재홍 등 새 얼굴을 발굴하고 신선한 소재, 쿠키 영상으로 차기작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젊은 관객과 호흡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흥행이 모두 만족스럽진 못했다. 전 감독은 “하고 싶은 걸 찾아내 그걸 해내는 게 제 꿈이었는데, 점점 더 그게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재밌는 걸 관객이 재밌어할 때 선물을 돌려받는 기분이다.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