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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3만 달러 넘는 국가엔 ‘제왕적 대통령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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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개헌 성공의 조건 <상> 

알랭 베르세 스위스 대통령이 지난달 8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스위스 대통령은 연방 각료 7명이 1년씩 돌아가며 맡는다. [뉴스1]

알랭 베르세 스위스 대통령이 지난달 8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스위스 대통령은 연방 각료 7명이 1년씩 돌아가며 맡는다. [뉴스1]

2016년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561달러다. 통계청에 따르면 스위스(7만9511달러)부터 이탈리아(3만1182달러)까지 22개국의 소득이 한국보다 높다. 22개국의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가 다수다.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곳은 미국이 유일하고 핀란드와 프랑스, 오스트리아 정도가 이원집정부제로 분류된다.

경제적 삶과 직결되는 권력 분산 #22곳 중 21곳 내각제·이원집정부제 #미국은 연방·지방정부 권한 막강 #입법·사법·행정 3권 분립도 철저 #권력 집중 강한 남미, 경제 불안정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국가들 가운데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시킨 제도를 택한 곳은 극히 드물다”며 “권력 분산은 정치의 문제일 뿐 아니라 시민의 경제적 삶과 직결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들 국가 중엔 대통령이란 자리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있더라도 내부적으로 국민을 통합하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수준 정도로 역할이 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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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경우 연방의회에서 선출된 각료 7명이 1년씩 돌아가며 대통령을 맡는데 대외적으로 스위스를 대표할 뿐 직위도 각료들과 동일하다. 일본과 호주, 싱가포르,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유럽 국가들로 전제군주와 맞서 싸우며 시민이 권리를 확장해 온 근·현대사의 경험이 곧 의원내각제로 이어졌다.

손병권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삼부회(三部會) 등 전제군주와 싸우는 과정에서 쌓은 전통과 다양한 계급·민족을 포용할 필요성, 현대 들어 겪은 탈공산화 과정 등이 한데 어우러져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자연스레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구(舊)소련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강한 이원집정부제를 택했던 핀란드는 소련 해체 후 수차례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점차 줄였다.

미국은 대통령제가 태동한 대표적인 국가다. 선진국 중 드물게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미국의 대통령제는 우리와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입법과 사법, 행정 삼권 분립의 원리를 세우고 이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 미국이다”며 “예산과 인사를 의회가 통제하고 사법부의 독립도 보장돼 있어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이 덜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각 주(states)가 모인 연방제(united) 국가로, 지방자치 권한이 막강하다. 건국 과정에서 행정 집행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행정수반(대통령)을 1명으로 둔 것으로,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1명의 행정수반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종국에는 군주제를 낳을 것”이라며 복수의 행정수반을 두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권한이 강한 국가는 주로 중남미에 있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대표적이다. 오랜 기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의 식민지였던 이들 중남미 국가는 독립 이후에도 수십 년간 군부 독재에 시달렸다. 대부분 미국을 본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이 군림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국가가 많다.

정경원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장은 “정복과 피정복의 역사를 거치면서 개인의 권리를 일부 양도하되 누군가에게 삶을 의지하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며 “이런 문화와 맥이 닿아 있는 제도가 중남미의 대통령제로, 시민의 권리 보장이라는 일반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권 국가 중 민주주의의 모범이란 평가를 받던 터키의 경우는 최근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치하에서 권위주의 색채가 더 짙어졌다. 2010년 개헌으로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바꿨고, 지난해 7월엔 국민투표를 거쳐 94년간 유지해 온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꿨다.

새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법률에 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대통령은 1회 중임할 수 있지만 국회 동의가 있을 경우 다시 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

세계 헌법재판기구 협의체인 베니스위원회는 터키의 새 헌법이 “터키의 입헌민주주의 전통에 역행하는 위험한 시도로 전제주의와 1인 지배에 이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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