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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거기 어디?] 이상하고 아름다운 '불필요' 상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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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 피혁 거리의 오래된 벽돌 건물. SNS에선 ‘성수동의 예쁜 카페’로 꽤 이름을 알린 오르에르의 입구를 지나 3층으로 곧장 올라가면 카페와는 또 다른 느낌의 상점이 나타난다. 이름은 ‘오르에르 아카이브(orer archive).’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한쪽 벽면. 눈길을 끄는 물건들이 하나씩 진열돼 있다. 유지연 기자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한쪽 벽면. 눈길을 끄는 물건들이 하나씩 진열돼 있다. 유지연 기자

언뜻 둘러봐도 비범해 보인다. 몇십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근사한 나무 천장과 벽,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멋스러운 나무 문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1960~70년대의 고풍스러운 양옥집 실내를 연상시킨다. 군데군데 간접 조명이 차분하게 실내를 밝힌다. 오래됐지만 아름다운 장식장과 가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그 구석구석에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각기 세월의 흔적을 뽐내고 있다.

나무 천장의 고풍스러운 몰딩이 돋보이는 거실 공간.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나무 천장의 고풍스러운 몰딩이 돋보이는 거실 공간.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실내에는 세월뿐만 아니라 음악과 향도 흐른다. 막스 리히터의 드라마틱한 모던 클래식 선율이 공간을 꽉 채우고, 일본 교토의 100년 된 향방 ‘훈옥당’에서 공수해온 나무 스틱을 태운 향기가 공간을 차분히 물들인다. 마치 갤러리같다. 가격은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물건을 파는 상점이다. 그런데 물건을 팔기보다, 손님들의 구경을 위해 꾸며 놓은 공간 같다.

성수동 ‘오르에르 아카이브’

지나간 취향의 역사를 전시하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모으는 데 열중했어요. 스티커, 메모지 등을 모으다가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유리 공예품, 빈티지 커트러리, 심지어 돌멩이까지 본격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죠.”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주인장 김재원 대표(38)의 말이다. 그는 성수동에서 꽤 유명하다. 2014년 ‘성수동 붐’의 신호탄이 된 카페 ‘자그마치’를 기획했고, 이어서 카페 ‘오르에르’와 일상품을 판매하는 디자인 편집숍 ‘WXDXH’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지난해 12월부터는 ‘오르에르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카이브라는 이름처럼 김 대표가 대학 시절부터 모아온 모든 것들을 망라한 가게다. 그의 지나간 취향의 역사를 전시하는 갤러리이자 아카이브인 셈이다.

일본 유리 공예 작가의 작품들. 입으로 불어서 하나하나 만드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물건들이다.

일본 유리 공예 작가의 작품들. 입으로 불어서 하나하나 만드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물건들이다.

그렇다고 하나만 깊이 파는 수집가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아카이브라는 이름이 가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왜 모았을까?’ 싶은 물건도 있단다. 영국 유학 시절 처음으로 돈을 모아 사들였던 도자기 인형부터 100년 된 프랑스 빈티지 커트러리, 아주 옛날 실험실에서 사용하던 기구들과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나무 촛대,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그릇, 조선 시대 해주 항아리까지. 취향의 역사가 제법 방대하다.

빈티지 커트러리와 촛대, 주물틀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법한 물건들이다.

빈티지 커트러리와 촛대, 주물틀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법한 물건들이다.

이처럼 오르에르 아카이브에 있는 물건의 절반 정도가 김재원 대표의 수집품이다. 나머지 절반은 국내외 작가들의 하나밖에 없는 공예 작품들이다. 거실 공간의 큰 테이블 위에는 김누리 작가의 화병들이 놓여있다. 같은 제품은 하나도 없다. 모두 손으로 만든 화병이기에 디테일이 제각기 다르다.

김누리 작가의 화병. 각각의 디테일이 모두 다른 수공예품이다.

김누리 작가의 화병. 각각의 디테일이 모두 다른 수공예품이다.

또 한쪽에는 입으로 붙어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놓여있다. 꽃 없이 화병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곡선이 눈길을 끈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한지가 벽에 걸려있는가 하면, 바스러질 듯 마른 나뭇가지와 마른 꽃이 귀한 오브제인양 자리해 있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서는 마른 나뭇가지나 꽃, 돌멩이도 하나의 작품이 된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서는 마른 나뭇가지나 꽃, 돌멩이도 하나의 작품이 된다.

불편한 가게, 물건 아닌 경험을 판다

왜 이런 가게를 만들었을까. 사실 물건을 팔기 위한 최적의 형태는 아니다. 일단 판매용 매장인지 전시공간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제품이 보기 좋게 일렬로 진열된 것도 아니고, 가격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점원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좀체 어떤 물건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100단계 이상의 수작업을 거쳐 만들어지는 일본 금속 차통. 커피 원두나 찻잎 등을 담을 수 있다.

100단계 이상의 수작업을 거쳐 만들어지는 일본 금속 차통. 커피 원두나 찻잎 등을 담을 수 있다.

김 대표는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음악을 들으며 물건을 관찰하고 설명을 듣고 향을 느끼는 등 쇼핑의 경험을 판매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물건을 살 수 있는 가게는 사실 너무 많다. 심지어 직접 발품을 팔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최저가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효율성의 시대다.
그만큼 물건을 구매할 때의 남다른 경험이 중요해졌다. 같은 물건을 사도 어떤 공간에 놓여 있고, 어떤 음악이 흐르고, 그 때의 기분은 어땠는지, 물건을 보면서 어떤 상상을 했는지, 포장은 어땠는지 등 여러 가지 경험이 결합된 소비를 제안하고 이를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상점인 셈이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는 늘 음악이 흐른다. 영국 빈티지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음악의 결은 이 공간의 느낌과 같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는 늘 음악이 흐른다. 영국 빈티지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음악의 결은 이 공간의 느낌과 같다.

이곳에 온 손님들은 대부분 물건을 천천히 감상하고, 자세히 질문한다고 한다. 그 물건의 역사부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등등에 관한 얘깃거리를 풍성하게 나눌 수 있다. 판매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 자세히 관찰하고 그 자체로 만족하는 손님들을 보면 뿌듯하단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물건

일반적인 상점이라면 물건이 팔리면 재고를 찾거나 다시 주문할 수 있다. 하지만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물건들은 대부분 다시 주문한대도 똑같은 것은 구할 수 없는 수공예품이다.

소재는 도자기인데 마치 금속제처럼 보이는 독특한 디테일의 그릇들.

소재는 도자기인데 마치 금속제처럼 보이는 독특한 디테일의 그릇들.

그러다 보니 하나씩 팔려 나갈 때마다 허전하고 심지어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고 한다. 정말로 딱 하나뿐인 제품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딱히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런 사람에게 뭔가를 선물할 때 이런 물건들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르에르 아카이브에 놓인 물건들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만큼 귀하다. 예를 들어 반짝이는 돌이나, 나뭇가지 등 그 자체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비일상적인 물건도 있지만 어쩐지 하나쯤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김 대표는 “우리 삶에 꼭 실용적인 것만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냥 책상 위나 창가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물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는 용도는 분명치 않지만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하다. 반짝이는 돌 역시 그 중 하나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는 용도는 분명치 않지만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하다. 반짝이는 돌 역시 그 중 하나다.

오는 3월부터는 ‘게스트 아카이브’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취향 있는 누군가의 수집품들을 들여다본다는 콘셉트로 게스트를 정해서 그의 물건들을 전시하고 판매할 예정이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차분한 오후 풍경.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차분한 오후 풍경.

세상에 물건을 파는 가게는 많다. 하지만 이곳에 가면 멋지고 아름다운 물건이 반드시 있다. 혹은 내 취향의 물건이 하나쯤 꼭 있다는 확신을 준다. 물건이 흔해지고 쇼핑이 지루해진 시대, 오르에르 아카이브는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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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 및 영상=전유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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