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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암호화폐 공개 금지 … 스위스·싱가포르로 엑소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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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암호화폐, 투기서 산업으로 <중> 

미국 정보기술(IT) 매체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2월까지 전 세계 암호화폐 관련 기업이 암호화폐 공개(ICO)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45억 달러(4조8200억원)에 달한다. 파일코인(Filecoin)·테조스(Tezos)가 ICO로 각각 2억7700만 달러, 2억3200만 달러를 끌어모았다. 벤처캐피털을 통한 건 13억 달러에 그쳤다. 암호화폐 열풍이 투자 패턴까지 바꾸는 셈이다.

세계시장 1년 새 5조, 소외된 한국 #국내 업체, 해외법인 만들어 추진 #투자금·우수인력 해외 유출 우려 #실패 위험 높아 투자자 보호 필요 #미국은 기업공개 준하는 자격 요구 #무조건 규제보다 가이드라인 내야

한국은 이런 바람에 비켜 있다. 정부가 원칙적으로 ICO를 금지하고 있어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9월 29일 “모든 형태의 ICO를 금지한다”고 밝혔다.

이렇다 보니 국내 업체는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 해외에 법인이나 재단을 만들어 ICO를 추진한다. 규제가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는 데다 아이콘 등 성공사례가 나오면서 아예 해외로 눈길을 돌린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해외 ICO는 보통 여러 나라 업체와 합작 형태로 이뤄지는데 한국 업체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만 유럽에서 20개 이상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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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ICO를 해도 한국인에게 투자를 권하면 불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국내 투자자가 해외 ICO에 참여한다. 투자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장기적으론 우수 인력의 유출도 우려할 만한 부분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ICO는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는 것으로 원금 보장이나 수익을 약속하고 자금을 모으는 유사수신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 역차별’이란 지적도 있다. 해외 ICO를 추진할 여력이 있다면 모르지만 작은 업체는 엄두를 못 낸다. 지난해 해외에서 ICO를 추진한 국내 업체는 대기업 계열이거나 모기업이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풀어줄 순 없다. 지금의 ICO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전문매체 비트코인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ICO를 추진한 902개 기업 중 142개 기업이 자금 조달 전에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276개 기업은 모금은 했지만 이후 실패했다. 투자자와의 소통을 중단해 ‘사실상 실패’로 볼 수 있는 기업도 113개였다. 전체의 59%가 문을 닫은 셈이다. 당장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곳까지 고려하면 투자 성공률이 매우 낮다.

업체들은 보통 블록체인을 활용한 서비스(기술)의 가치와 사업계획 등을 담은 백서를 내놓고, 홈페이지를 연 상태에서 ICO를 한다. 개발은 돈을 받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팸플릿만 보고 물건을 사는 셈이다.

또 해당 암호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기술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 코드를 분석할 능력이 필요하다. 보안 문제는 없는지도 꼼꼼히 따져야 한다. 대다수 투자자는 업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한다. 모럴해저드에 따른 시세 조종이나 내부자 거래에 취약한 구조다.

마땅한 투자자 보호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ICO를 금지한 건 불가피했다. 이 결과 급상승하던 암호화폐 가격이 안정됐다는 점에서 효과도 있었다.

이제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는 만큼 정부가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은 ICO를 하려면 기업공개(IPO)에 준하는 자격을 갖추도록 했다. 일본은 거래소 등록제를 시행하고 있다.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다.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규제 혹은 탈규제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관료주의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며 “개발자·업체·거래소·투자자와 대화하고, 배우면 얼마든지 산업을 키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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