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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MB에게 다가온 잔인한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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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2009년 3월 20일,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 기자들과 함께한 점심 자리에서 시를 읊었다. “겨울은 오히려 따듯했네. 4월은 잔인한 달.” 엘리엇의 ‘황무지’ 중 한 대목이다. 그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수사는 파죽지세로 진행됐다. 이광재 전 의원, 박정규 전 민정수석,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와 권양숙 여사가 잇따라 소환됐다. 그리고 4월의 마지막 날에 노 전 대통령이 대검 포토라인 앞에 섰다. 방송사 헬기가 봉하마을부터 서초동까지 버스 상경을 생중계했다. 술잔을 들고 잔인함을 예고한 중수부장의 처신은 역사에 기록됐다.

검찰 “구속영장 청구 불가피” 입장 #재고 명분 줄 수 있는 사람은 MB뿐

노 전 대통령 조사 뒤 검찰은 장고(長考)에 빠졌다.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은 구속영장 청구 문제를 놓고 전직 검찰총장·법무부 장관, 정치인, 언론사 간부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 중수부장과 주임검사(우병우 당시 중수1과장)가 영장 청구를 고집하고 있었다. 검찰총장의 좌고우면 속에서 3주가 넘는 시간이 지났고, 5월 23일에 비극이 일어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회고록 『운명』에 이렇게 적었다. ‘소환 조사는 마지막 수순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신병 처리를 하든가, 불구속 기소라도 하든가, 아니면 무혐의 처리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 처리를 못한 채 질질 끌었다.’ 한탄과 원망이 배어 있다.

9년 뒤 또 다른 봄, 그 잔인했던 시절의 대통령이었던 이명박(MB) 전 대통령에게 검찰이 출석을 요구했다. 나흘 뒤에 조사가 이뤄진다. 검찰은 과연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인가. 현재 검찰 기류는 “그렇다” 쪽이다.

지난해 말 검찰 수뇌부가 전직 검찰총장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MB 수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돈(뇌물) 문제가 아니면 불구속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국가정보원 ‘댓글 공작’과 김경준씨에 대한 소송과 연관된 직권남용 정도가 문제였다. 원로들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역시 수사는 생물이다. 이후 상황이 돌변했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유용과 인사 청탁과 관련한 뇌물수수 혐의가 튀어나왔다. MB 측은 잘 모르거나 직접 관여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수사팀에선 “측근들이 다 진술했다”는 말이 나온다. MB 주변인들은 협조를 안 하면 독박 위험을 안게 되는 ‘죄수의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한 검찰 간부는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했다. 원로원 명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카이사르에게 회군은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미 검찰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는 뜻이다. “형평성 차원에서….” “형평성 문제도 있고….” MB 구속영장 청구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검찰 측 인사들은 한결같이 ‘형평’을 거론한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사법적 판단이 달라질 수 없고,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균형 문제도 있다는 말이다. “도주·증거 인멸 또는 피해자 위해(危害) 우려가 없을 때는 불구속 재판이 형사소송의 대원칙 아니냐”고 얘기하면 “아휴, 그러면 지금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 다 풀어줘야지”라고 대꾸한다.

한 전직 고검장은 “검찰이 영장 청구를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MB 측에서 전향적 태도를 보여 국민의 이해를 어느 정도 얻고 국민이 국격(國格)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하지 않으면 검찰은 가던 길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MB 입장에선 혐의를 고스란히 인정하는 것으로 비친다는 부담을 안게 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2009년 검찰 간부들은 법원에서의 영장 기각 사태를 우려했다. 그런데 지금 검찰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MB에게 남겨진 시간이 별로 없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