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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멘토] 지방자치 부활, 5공 청산 이끌어 … 협치 꽃피운 ‘지둘려 선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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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원기(81) 전 국회의장은 30년 전이던 1988년 협치의 정치를 꽃피운 ‘명 원내총무(원내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여소야대 4당 체제 시절 김 전 의장은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원내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김윤환 민주정의당(민정당) 원내총무와 숱한 협상을 이끌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 청문회에 불러 세우고 ‘광주 학살’ 책임을 물어 정호용 민정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이끌어낸 주역이 김윤환ㆍ김원기 콤비다.

허주 김윤환과 끈질긴 협상 #88년 서슬퍼른 군부정권 시대 #전두환 국회 청문회 불러세워 #여소야대 4당 체제의 정치 #유리 그릇 다루듯 야3당 공조 #신뢰 바탕으로 개혁과제 관철 #문재인 정부 어떻게 보나 #정치 오래 안 했는데 잘하고 있어 #대통령 개헌 주도는 바람직 안 해

김 전 의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슬퍼런 군부 정권 시대였지만 여야가 협치를 했다. ‘정치’라는 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더불어민주당ㆍ자유한국당ㆍ바른미래당ㆍ민주평화당 등 신(新) 4당 체제가 정립된 지금도 정국 운영의 열쇠는 협치에 있다고 김 전 의장은 강조한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협치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여야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은 결국 믿음“이라고 했다. 김경록 기자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협치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여야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은 결국 믿음“이라고 했다. 김경록 기자

김 전 의장의 별명은 ‘지둘려(기달려보라) 선생’이다. 정치부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 대신 “지둘려”(기다려보라)”라는 말을 자주 했고 여야 협상이 끝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두르기’를 잘 해서다. 김 전 의장의 ‘지둘려 정신’이 정치권 주목을 받은 게 세밑 결산을 앞두고 있던 2004년 12월 말이다. 당시 국회의장으로서 국회 사회권을 갖고 있던 그의 손에 한해 결산이 달려 있을 때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출신임에도 김 전 의원이 여야 간 미합의를 이유로 국회 사회를 한사코 거부하자 여당 내부에서는 ‘의장 불신임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김 전 의장은 그런 여당 의원들을 만나면 오히려 “정치 똑바라 하라”며 호통을 친 일은 유명한 일화다.

김 전 의장은 인터뷰에서 “여야 간 모든 정치의 출발은 신뢰”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집안 분위기로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 할 생각” 

전주고를 졸업했는데 전주고 출신 중 정ㆍ관계나 언론계에 유명 인사들이 많지 않나.
전주고 출신들이 특히 언론계에 많다.
전주고 졸업 후 상경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요즘 뜨는 ‘연정(연세대 정외과 출신) 라인’인데, 입학 당시에도 주변에서 많이들 축하했을 것 같다.
부모님들은 내가 어디든 대학 진학할 거라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다. 옛날에는 수도권과 지방 학교 간 진학률 차이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전주고만 하더라도 서울대 진학률이 당시 가장 명문고였던 경기고나 서울고보다는 못했지만 그 밖의 다른 명문고들에 뒤지지 않았다.
연세대 정외과를 지망할 때부터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나.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 생각을 했다. 우리 집안 자체가 일찍부터 국회의원 선거를 경험했고 이승만 정부 때 지방자치단체 선거도 겪었다. 우리 집안에서 정치 후보자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선거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일찍 생각하게 됐다.
대학 졸업 후 1960년 신문사 기자로 입사했는데, 당시 경쟁률은 어느 정도였나.
1960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어디에도 시험칠 곳이 없었다. 유일하게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 곳이 동아일보, 한국일보, 그리고 KBS 아나운서 시험 정도였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낭낭하지 못해서 아나운서 가능성은 없는 것이고, 그래서 동아일보 시험을 쳤다. 6명을 뽑는데 1000명이 응시했으니 100대1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이낙연 총리가 기자 때 쓴 기사로 곤란한 일 겪어”

16년가량 언론인으로 있다 1976년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했다. 어디와도 상의하지 않고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에 공천 지망을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같은 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인 활동 기간은 서로 겹치지 않은데 내가 신민당 의원일 때 이 총리가 당 출입기자였고 같은 신문사 후배니까 가깝게 지냈다. 이낙연 기자 때문에 아주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다.
어떤 일이 있었나.
11대 국회에서 내가 야당 원내총무로 발탁될 거란 예상 기사들이 나올 때였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 때만 해도 권력 쪽에서 야당 원내총무 선임에도 상당히 압력을 행사할 때다. 당 부총재 한 분을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는데 ‘자네는 (원내총무에서) 배제가 됐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당시 이낙연 기자가) 자꾸 확실하다는 기사를 내길래 ‘지금 어떤 세상인지 알고 기자를 하나’ 하면서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무슨 얘기를 했나.
부총재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얘기하고 말았다. 당시 이낙연 기자가 다음날 신문 지면에 내버려서 그 부총재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그래서 이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 약속을 걸었는데 왜 안 지키켰느냐’고 했더니 자기 정의감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아 써버렸다고 하더라.

“1988년 대화와 타협의 정치 꽃피웠던 때” 

1989년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시절 4당 대표가 만났다. 왼쪽부터 김용채 공화당, 김원기 평민당, 김윤환 민정당, 이기택 민주당 원내총무. [중앙포토]

1989년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시절 4당 대표가 만났다. 왼쪽부터 김용채 공화당, 김원기 평민당, 김윤환 민정당, 이기택 민주당 원내총무. [중앙포토]

1988년 13대 국회에서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이끈 평화민주당(평민당)이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여소야대 4당 체제가 됐다. 제1야당이던 평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협치의 정치를 꽃피웠다는 평가가 있는데.
그때가 우리나라 의정사에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꽃피웠던 거의 유일한 때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허주 김윤환 원내총무와는 서로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어서 많은 개혁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당시 5공 비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야당 요구안들이 상당부분 관철됐다.
당시는 군부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여당 민정당과 DJㆍYS(김영삼 전 대통령)ㆍ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각각 이끄는 평민당ㆍ통일민주당(통민당)ㆍ신민주공화당이라는 야 3당 등 4당이 정립해있었다. 신민주공화당은 뿌리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민정당 쪽과 더 가까웠고 YS와 DJ가 민주화 투쟁을 같이한 동지이긴 했지만 정치적 갈등도 컸다. 그래서 제1야당 원내총무인 제 입장에서는 유리그릇을 다루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야 3당 공조를 이끌어갔다.
허주와는 신뢰가 돈독했나 보다.
여야 간에 성공적 결론 도출을 위해서는 신뢰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나와 허주가 열흘 정도 비밀리에 밤낮 없이 협상을 한 끝에 1989년 3월 21일 맺은 합의각서를 아직도 갖고 있다.
합의각서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5공 청산의 획기적인 합의안들이다. 당시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것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고,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유가족 보상을 위한 특별법에 합의했다. 또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때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씨가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제2인자 역할을 할 때인데, 정씨를 의원직 등 공직에서 몰아내도록 했다. 그밖에 광주 문제와 관련된 기념관 건립,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출석 및 사과, 5공 언론 통폐합 조치의 원상회복과 피해 보상 등이다.

“DJ, 당장 손해 불구 멀리 보고 ‘지자제 부활’ 관철”

합의 내용 중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이승만 정부 때 시행됐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없앤 지방자치제의 부활이다. 사실 우리 야당이 지자제 부활을 요구했지만, 당시는 현역 여당 지자체장들이 버티고 있어 야당이 이길 수 없을 때다.
1991년 10월 민주당 마포당사 입주식에 참석한 김원기 전 의장. 왼쪽은 당시 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중앙포토]

1991년 10월 민주당 마포당사 입주식에 참석한 김원기 전 의장. 왼쪽은 당시 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중앙포토]

그럼에도 지자제 부활을 요구한 이유는.
DJ의 통 큰 결단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지자체 선거를 하면 우리 당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DJ가 그러다라. ‘전국에서 민정당 소속 지자체장들이 압도적으로 다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 지자체장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당장은 불리해도 지자체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DJ의 지도자적 면모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야당의 참패가 확실하고 그러면 거기서 오는 정치적 손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0년, 20년을 내다보고 큰 결정을 내렸다. 다른 것을 손해보더라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 쟁취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1992년 열린 민주당 1차 전당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원기 전 의장. [중앙포토]

1992년 열린 민주당 1차 전당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원기 전 의장. [중앙포토]

그렇게 협치를 꽃피우는 듯했는데, 1990년 민정당ㆍ통민당ㆍ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 선언을 했다.
여소야대 4당 체제가 파탄나지 않고 1년만 더 계속됐더라도 훨씬 좋았을텐데 그게 좌절된 점이 지금도 아쉽다.

“노무현, 2002년 대선 때 ‘소신 지키다 낙선하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협상을 할 때다. 당시 유력했던 이회창 후보에 맞설 단일후보를 여론조사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여론조사 문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불리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합의가 안 되고 협상이 질질 끌어졌다. 그런데 당시 노 후보가 ‘그냥 그 사람들이 하자는대로 합시다’ 하면서 정 후보 측 요구를 수용했다. 그대로 여론조사를 하면 노 후보가 상당히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캠프 내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노무현다운 결단이었다.
2002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를 한 정몽준(왼쪽)과 노무현 후보. [중앙포토]

2002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를 한 정몽준(왼쪽)과 노무현 후보. [중앙포토]

예상을 뒤엎고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가 이겨 승부수가 통한 셈이 됐다.
실제 선거운동에서는 정 후보 측이 잘 도와주지 않았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대통령 당선이 되면) 어떤 자리를 어떻게 해달라 이런 요구가 지루하게 들어왔다. 나중에는 나를 통해 이런 제안까지 왔다. 문서로 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포기할테니 노 후보가 정 후보와 단 둘이 만나 ‘내가 대통령이 될 때는 당신들과 어떻게 같이 해나가겠다’는 말을 덕담 형식으로 해주면 선거운동 적극 참여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노 후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노 후보 답변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그렇게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대통령은 차라리 않겠다. 차라리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을 해서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했다.

“개헌 논의, 대통령 권력 주도는 바람직하지 않아”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 국정 지지도가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 원로들끼리 모였을 때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이 정치를 오래 해본 분도 아닌데 지금 국정 운영 하시는 것을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잘 한다고. 역대 대통령들이 예외 없이 끝이 불행했는데 이대로 가면 끝이 좋은 대통령이 처음으로 한 번 나올 수 있겠다.
2016년 8월 2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김원기 전 의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자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2016년 8월 2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김원기 전 의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자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 중이고 정부도 개헌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문 대통령이 정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국회에 개헌 논의 진전을 촉구하기 위해 단호한 각오를 보인 거라 생각한다. 개헌 논의를 대통령 권력이 나서서 주도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국회가 주도해야 하고 대통령은 개헌 문제에 있어서는 인내를 갖고 대해주길 바란다.

“정치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바탕이 결국 믿음”

인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내가 『믿음의 정치학』이란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우리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 결국은 여야 관계, 또 정치와 국민의 관계, 그리고 그밖의 모든 관계에 있어 믿음이 없어서 빚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치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결국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용기를 갖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맞서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난관은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했으면 좋겠다.
인생을 한 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생에 고비가 오면 모든 것을 망칠 것 같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견디면 그 또한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극복하면 된다.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1937년 전북 정읍 출생
1955년 전주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0~1976년 동아일보 기자
1979~1980년 제10대 국회의원(신민당)
1981~1985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한국당)
1988~1991년 제13대 국회의원(평화민주당)
1992~1995년 제14대 국회의원(민주당)
1988~1990년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2003년 열린우리당 상임의장
2004~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2004~2006년 국회의장
2015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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