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기(81) 전 국회의장은 30년 전이던 1988년 협치의 정치를 꽃피운 ‘명 원내총무(원내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여소야대 4당 체제 시절 김 전 의장은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원내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김윤환 민주정의당(민정당) 원내총무와 숱한 협상을 이끌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 청문회에 불러 세우고 ‘광주 학살’ 책임을 물어 정호용 민정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이끌어낸 주역이 김윤환ㆍ김원기 콤비다.
허주 김윤환과 끈질긴 협상 #88년 서슬퍼른 군부정권 시대 #전두환 국회 청문회 불러세워 #여소야대 4당 체제의 정치 #유리 그릇 다루듯 야3당 공조 #신뢰 바탕으로 개혁과제 관철 #문재인 정부 어떻게 보나 #정치 오래 안 했는데 잘하고 있어 #대통령 개헌 주도는 바람직 안 해
김 전 의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슬퍼런 군부 정권 시대였지만 여야가 협치를 했다. ‘정치’라는 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더불어민주당ㆍ자유한국당ㆍ바른미래당ㆍ민주평화당 등 신(新) 4당 체제가 정립된 지금도 정국 운영의 열쇠는 협치에 있다고 김 전 의장은 강조한다.
김 전 의장의 별명은 ‘지둘려(기달려보라) 선생’이다. 정치부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 대신 “지둘려”(기다려보라)”라는 말을 자주 했고 여야 협상이 끝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두르기’를 잘 해서다. 김 전 의장의 ‘지둘려 정신’이 정치권 주목을 받은 게 세밑 결산을 앞두고 있던 2004년 12월 말이다. 당시 국회의장으로서 국회 사회권을 갖고 있던 그의 손에 한해 결산이 달려 있을 때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출신임에도 김 전 의원이 여야 간 미합의를 이유로 국회 사회를 한사코 거부하자 여당 내부에서는 ‘의장 불신임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김 전 의장은 그런 여당 의원들을 만나면 오히려 “정치 똑바라 하라”며 호통을 친 일은 유명한 일화다.
김 전 의장은 인터뷰에서 “여야 간 모든 정치의 출발은 신뢰”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집안 분위기로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 할 생각”
- 전주고를 졸업했는데 전주고 출신 중 정ㆍ관계나 언론계에 유명 인사들이 많지 않나.
- 전주고 출신들이 특히 언론계에 많다.
- 전주고 졸업 후 상경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요즘 뜨는 ‘연정(연세대 정외과 출신) 라인’인데, 입학 당시에도 주변에서 많이들 축하했을 것 같다.
- 부모님들은 내가 어디든 대학 진학할 거라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다. 옛날에는 수도권과 지방 학교 간 진학률 차이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전주고만 하더라도 서울대 진학률이 당시 가장 명문고였던 경기고나 서울고보다는 못했지만 그 밖의 다른 명문고들에 뒤지지 않았다.
- 연세대 정외과를 지망할 때부터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나.
-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 생각을 했다. 우리 집안 자체가 일찍부터 국회의원 선거를 경험했고 이승만 정부 때 지방자치단체 선거도 겪었다. 우리 집안에서 정치 후보자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선거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일찍 생각하게 됐다.
- 대학 졸업 후 1960년 신문사 기자로 입사했는데, 당시 경쟁률은 어느 정도였나.
- 1960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어디에도 시험칠 곳이 없었다. 유일하게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 곳이 동아일보, 한국일보, 그리고 KBS 아나운서 시험 정도였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낭낭하지 못해서 아나운서 가능성은 없는 것이고, 그래서 동아일보 시험을 쳤다. 6명을 뽑는데 1000명이 응시했으니 100대1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이낙연 총리가 기자 때 쓴 기사로 곤란한 일 겪어”
- 16년가량 언론인으로 있다 1976년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 여러 가지 여건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했다. 어디와도 상의하지 않고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에 공천 지망을 했다.
- 이낙연 국무총리도 같은 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 언론인 활동 기간은 서로 겹치지 않은데 내가 신민당 의원일 때 이 총리가 당 출입기자였고 같은 신문사 후배니까 가깝게 지냈다. 이낙연 기자 때문에 아주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다.
- 어떤 일이 있었나.
- 11대 국회에서 내가 야당 원내총무로 발탁될 거란 예상 기사들이 나올 때였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 때만 해도 권력 쪽에서 야당 원내총무 선임에도 상당히 압력을 행사할 때다. 당 부총재 한 분을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는데 ‘자네는 (원내총무에서) 배제가 됐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당시 이낙연 기자가) 자꾸 확실하다는 기사를 내길래 ‘지금 어떤 세상인지 알고 기자를 하나’ 하면서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 무슨 얘기를 했나.
- 부총재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얘기하고 말았다. 당시 이낙연 기자가 다음날 신문 지면에 내버려서 그 부총재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그래서 이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 약속을 걸었는데 왜 안 지키켰느냐’고 했더니 자기 정의감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아 써버렸다고 하더라.
“1988년 대화와 타협의 정치 꽃피웠던 때”
- 1988년 13대 국회에서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이끈 평화민주당(평민당)이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여소야대 4당 체제가 됐다. 제1야당이던 평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협치의 정치를 꽃피웠다는 평가가 있는데.
- 그때가 우리나라 의정사에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꽃피웠던 거의 유일한 때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허주 김윤환 원내총무와는 서로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어서 많은 개혁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 당시 5공 비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야당 요구안들이 상당부분 관철됐다.
- 당시는 군부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여당 민정당과 DJㆍYS(김영삼 전 대통령)ㆍ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각각 이끄는 평민당ㆍ통일민주당(통민당)ㆍ신민주공화당이라는 야 3당 등 4당이 정립해있었다. 신민주공화당은 뿌리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민정당 쪽과 더 가까웠고 YS와 DJ가 민주화 투쟁을 같이한 동지이긴 했지만 정치적 갈등도 컸다. 그래서 제1야당 원내총무인 제 입장에서는 유리그릇을 다루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야 3당 공조를 이끌어갔다.
- 허주와는 신뢰가 돈독했나 보다.
- 여야 간에 성공적 결론 도출을 위해서는 신뢰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나와 허주가 열흘 정도 비밀리에 밤낮 없이 협상을 한 끝에 1989년 3월 21일 맺은 합의각서를 아직도 갖고 있다.
- 합의각서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 5공 청산의 획기적인 합의안들이다. 당시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것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고,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유가족 보상을 위한 특별법에 합의했다. 또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때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씨가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제2인자 역할을 할 때인데, 정씨를 의원직 등 공직에서 몰아내도록 했다. 그밖에 광주 문제와 관련된 기념관 건립,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출석 및 사과, 5공 언론 통폐합 조치의 원상회복과 피해 보상 등이다.
“DJ, 당장 손해 불구 멀리 보고 ‘지자제 부활’ 관철”
- 합의 내용 중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 이승만 정부 때 시행됐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없앤 지방자치제의 부활이다. 사실 우리 야당이 지자제 부활을 요구했지만, 당시는 현역 여당 지자체장들이 버티고 있어 야당이 이길 수 없을 때다.
- 그럼에도 지자제 부활을 요구한 이유는.
- DJ의 통 큰 결단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지자체 선거를 하면 우리 당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DJ가 그러다라. ‘전국에서 민정당 소속 지자체장들이 압도적으로 다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 지자체장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당장은 불리해도 지자체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 지금 되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 DJ의 지도자적 면모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야당의 참패가 확실하고 그러면 거기서 오는 정치적 손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0년, 20년을 내다보고 큰 결정을 내렸다. 다른 것을 손해보더라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 쟁취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 그렇게 협치를 꽃피우는 듯했는데, 1990년 민정당ㆍ통민당ㆍ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 선언을 했다.
- 여소야대 4당 체제가 파탄나지 않고 1년만 더 계속됐더라도 훨씬 좋았을텐데 그게 좌절된 점이 지금도 아쉽다.
“노무현, 2002년 대선 때 ‘소신 지키다 낙선하더라도…’”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협상을 할 때다. 당시 유력했던 이회창 후보에 맞설 단일후보를 여론조사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여론조사 문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불리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합의가 안 되고 협상이 질질 끌어졌다. 그런데 당시 노 후보가 ‘그냥 그 사람들이 하자는대로 합시다’ 하면서 정 후보 측 요구를 수용했다. 그대로 여론조사를 하면 노 후보가 상당히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캠프 내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노무현다운 결단이었다.
- 예상을 뒤엎고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가 이겨 승부수가 통한 셈이 됐다.
- 실제 선거운동에서는 정 후보 측이 잘 도와주지 않았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대통령 당선이 되면) 어떤 자리를 어떻게 해달라 이런 요구가 지루하게 들어왔다. 나중에는 나를 통해 이런 제안까지 왔다. 문서로 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포기할테니 노 후보가 정 후보와 단 둘이 만나 ‘내가 대통령이 될 때는 당신들과 어떻게 같이 해나가겠다’는 말을 덕담 형식으로 해주면 선거운동 적극 참여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노 후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노 후보 답변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그렇게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대통령은 차라리 않겠다. 차라리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을 해서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했다.
“개헌 논의, 대통령 권력 주도는 바람직하지 않아”
-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 국정 지지도가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 정치 원로들끼리 모였을 때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이 정치를 오래 해본 분도 아닌데 지금 국정 운영 하시는 것을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잘 한다고. 역대 대통령들이 예외 없이 끝이 불행했는데 이대로 가면 끝이 좋은 대통령이 처음으로 한 번 나올 수 있겠다.
-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 중이고 정부도 개헌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 문 대통령이 정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국회에 개헌 논의 진전을 촉구하기 위해 단호한 각오를 보인 거라 생각한다. 개헌 논의를 대통령 권력이 나서서 주도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국회가 주도해야 하고 대통령은 개헌 문제에 있어서는 인내를 갖고 대해주길 바란다.
“정치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바탕이 결국 믿음”
- 인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 내가 『믿음의 정치학』이란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우리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 결국은 여야 관계, 또 정치와 국민의 관계, 그리고 그밖의 모든 관계에 있어 믿음이 없어서 빚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치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결국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인생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용기를 갖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맞서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난관은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했으면 좋겠다.
- 인생을 한 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인생에 고비가 오면 모든 것을 망칠 것 같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견디면 그 또한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극복하면 된다.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1937년 전북 정읍 출생
1955년 전주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0~1976년 동아일보 기자
1979~1980년 제10대 국회의원(신민당)
1981~1985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한국당)
1988~1991년 제13대 국회의원(평화민주당)
1992~1995년 제14대 국회의원(민주당)
1988~1990년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2003년 열린우리당 상임의장
2004~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2004~2006년 국회의장
2015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