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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유관순 열사 발자취마다 만세 소리 귓가에 맴도네요

중앙일보

입력

지난 3월 1일은 제99주년 3·1절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죠. 이날을 기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뿐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죠. 그중 소중 독자 여러분과 비슷한 10대의 나이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선 이가 있습니다. 바로 유관순 열사예요.

글=김현정 기자 hyeon7@joongang.co.kr, 동행취재=김지민(서울 서이초 6)·장우진(경기도 용인심곡초 6) 학생기자,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자료·사진=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유관순열사기념관, 참고도서=『3·1운동의 얼 유관순』『유관순 열사 발자취』

1일과 6일은 아우내 장날입니다. 아우내는 ‘2개의 내(개천)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충남 천안 병천면의 한글 이름이에요. 이곳은 경상도와 수도 한양을 이어주는 길목이라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인근 장터 중에서도 크게 번성했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장날마다 아우내에서 장을 봅니다. 소중 학생기자들이아우내를 찾아온 26일도 거리엔 노점상들이 즐비했어요. 갑자기 웬 장터 구경이냐고요? 99년 전 봄, 아우내 장터에선 유관순 열사가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거든요. 유관순 열사는 어떻게 만세운동을 하게 됐을까요. 그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서울에서 외친 첫 번째 만세  

“아이고, 아이고. 황제께서 돌아가시다니….”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온 국민은 충격을 받고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사망 원인을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양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당하고 절치부심하던 황제의 죽음은 여러 의혹을 불렀죠.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족적 울분과 일본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커졌습니다. 지방마다 황제의 죽음을 추도하고, 3월 3일 국장일이 결정되자 상경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어요. 민족대표는 이를 기회로 삼고 3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합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울려 퍼지고, 구름같이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모두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를 부르며 남쪽 문으로 나간 시위 군중의 기세에 일본 관헌들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광화문 사거리, 덕수궁 광장까지 만세 소리로 뒤덮였죠. 하지만 유관순이 다니던 이화학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어요. 학생들을 염려한 프라이 교장의 뜻이었죠.

유관순은 김복순·국현숙·서명학·김희자 등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섰습니다. 5명의 결사대는 시위 군중 속으로 끼어들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죠. 무사히 학교로 돌아온 유관순과 친구들은 3월 5일 남대문 앞 학생단 시위에도 참여합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어요.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경하게 학생들을 내보내라 요구하자 국제 여론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일제는 할 수 없이 학생들을 풀어주죠. 그 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외친 두 번째 만세

고향인 천안 병천에선 유관순이 돌아온 다음 날인 14일 근처 목천보통학교에서 첫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 마을 어른 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 만세운동을 준비해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마을을 다니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죠. 밤에는 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그렸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후 10년 동안 태극기를 구경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자세한 모양을 몰랐죠. 유관순도 이화학당에서 친구 이정수와 밤새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학교 안에 붙이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는 잘 몰라 4괘를 아무렇게나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제대로 된 태극기 모양을 선생님께 배울 수 있었죠. 유관순이 직접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원심 공판시말서를 언급한 판결문에도 나옵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았습니다. 음력으로 3월 1일이기도 해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의 뜻을 살리기에도 좋았죠. 전날인 3월 31일 밤. 유관순은 어른들이 준비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마을 뒷산 매봉산을 올랐습니다. 169.6m로 높지 않지만 꼭대기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봉화를 올리기 좋았죠. 유관순이 든 횃불은 내일의 거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불길이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간 동서남북에서 24개의 불꽃이 어둠을 불살랐어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 3000명이 넘는 군중을 이뤘습니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눠줬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한 태극기의 물결은 어디까지나 평화롭게 나아갔어요. 하지만 일본 헌병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날 무자비한 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19명이 순국했고, 30여 명이 다쳤으며 유관순도 부상을 입고 체포됐죠.

옥중에서 외친 세 번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은 오랏줄에 묶여 천안 헌병분대를 거쳐 공주형무소로 끌려가면서도 사람들이 서 있는 길목마다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마다 헌병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죠. 당시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도 4월 1일 공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돼 공주 구치소에서 남매가 만나기도 했어요.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과 숙부 유중무, 조인원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합니다. 시위대가 일본인에 대한 살인이나 방화 등을 하지 않았는데 5년형을 선고받은 예가 없었던 것뿐 아니라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형량이 최고 3년이었던 것을 봐도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법정투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죠.

재판에서 유관순은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느냐”“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등 논리 정연한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들은 경성복심법원(서울)에 항소하여 3년형을 받죠. 다시 항소하자는 권유에 유관순은 “삼천리강산이 어딘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라며 마지막 항소를 포기합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지하 취조실에서 취조를 받고 가로세로 1m에 불과한 독방에서 대기하면서도 수시로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는 유관순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고문하며 밥을 굶겼죠.

1920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되자 유관순은 옥중 만세 시위를 벌입니다. 그가 갇힌 8호 감방에서부터 터져 나온 만세 소리에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했어요. 간수는 곧 유관순이 주동했다고 단정 짓고 모진 고문을 했죠. 계속되는 고문과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가 도지며 유관순은 그토록 목 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 채 1920년 9월 28일 순국합니다. 광복 이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이어 부른 만세

소중 학생기자들은 유관순 열사의 뒤를 쫓아 매봉산에 올랐습니다. 산 중턱에는 유관순 열사 추모각이 있어요. 이곳에선 매년 순국일에 추모제를 거행합니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 삼문을 지나자 2007년 봉안된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김지민·장우진 학생기자를 맞이했습니다. 정연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먼저 두 학생기자에게 분향을 하고 묵념을 하도록 했죠. 추모각을 알리는 표지판에 적힌 ‘사우’란 말이 궁금해 질문하자 정 해설사는 “집 우(宇)자를 써서 사당보다 높여 부른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추모각 뒤로 더 올라가면 아우내 만세운동 전날 봉화를 올렸던 것을 기념하는 봉화대와 봉화탑이 있습니다.
산 아래 기념관으로 향한 학생기자들은 타임캡슐을 발견했어요. 2003년 4월 1일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개관하며 제작한 것으로 유관순 열사와 관련한 정치·경제·사회·예술·교육 등 7개 분야서 73점을 선정해 넣었죠. 정 해설사는 “2102년 탄신 200주년 때 열어 볼 것”이라며 기념관 안으로 안내했어요. 학생기자들은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등본, 재판 기록문 등을 유심히 살펴봤죠. “유관순 열사의 유품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설명을 시작한 정 해설사는 수형자 기록표를 두고 “표에 보면 유관순 열사의 키가 5척 6촌이라고 쓰였죠. 지금으로 치면 169.7cm인데,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 제3226호(1923년 5월 15일)에 나온 조선인 고등보통학교 여학생 38명의 평균 키 150cm보다 훨씬 크다”고 설명했어요. 기록표 속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부은 얼굴에 굳은 표정이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죠.

아우내 만세운동 디오라마를 지나자 끌려가는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이 나타났는데요. 김지민 학생기자가 머리에 쓴 둥근 통 같은 것이 뭐냐고 물었죠. “용수라고 하는 거예요. 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거죠. 또 죄수가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게 하는 역할도 했어요.” 장우진 학생기자는 그 옆에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 때 쓴 벽관을 체험했습니다. 지민이가 잽싸게 문을 걸어 잠그자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나온 우진이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죠. 곧 밖으로 나와선 “10초도 못 있겠다”며 몸을 살짝 떨었답니다.
기념관엔 유관순 열사를 찾아온 다른 친구들도 있었는데요. 안양에서 온 이승비(안양중 1)·이한결(석수초 3) 형제와 제주도에서 온 오지륜(신촌초1), 두 학생기자는 즉석에서 의기투합해 아우내 만세운동을 직접 재현했습니다. 아우내 장날,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는 듯한 모습이었어요.

유관순 열사 사적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추모각, 초혼묘, 생가 등이 있다.
관람시간: 하절기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 오전 9시~오후 5시(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관람료: 무료(365일 개방)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학생기자 취재 후기

그동안 ‘유관순 열사’ 하면 17살에 독립운동 해서 감옥에 갇혀서 순국하신 분 이런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취재로 더 많은 걸 알게 됐어요. 비록 1시간 30분(왕복 3시간)을 차 타고 힘들게 왔지만 매봉산이나 매봉산 봉화 같은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어서 좋았죠. 유관순 열사 영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데 다리는 좀 아팠지만 분향하고 묵념한 것도 좋았습니다. 기념관에선 함께 취재한 우진 학생기자가 벽관 체험할 때 문을 잠근 것도 기억에 남네요. 유관순 열사 동상 앞에서 태극기 들고 만세를 부른 것도 잊을 수 없고요. 집에 가는 길에 올해 아우내 봉화제는 AI 확산 방지를 위해 안 한다는 것도 알게 되는 등 좋은 경험이 됐어요.
김지민(서울 서이초 6) 학생기자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선 마음이 아프고 분위기도 조금 무섭게 느껴졌어요. 유관순 열사가 그런 고문을 당하고 힘겹게 죽었다는 것이 슬펐기 때문이죠. 반면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됐거든요. 유관순 열사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먼저 앞장서고 먼저 이끌었습니다. 3.1만세 운동 때에도 감옥에서도 그랬죠.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용기와 정의를 지니고 모범을 보였어요. 나도 이런 용기와 정의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우진(경기도 용인심곡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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