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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어느 늦깎이 시인의 세상 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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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그러다 며칠 전 빨강 표지의 시집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시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덜 여문 듯싶다가도 잔뜩 삭힌 태가 배어났다. 일상을 이토록 섬뜩하게 묘파한 시가 진작에 있었는가.

'멀리서는/구층 여자가 나비를/날려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가까이 가보면/나비 날개를 떼어/구층 아래로 내던지고 있다.'-'나비'부분

시인에게 일상은 살풍경이다. 일요일 오전 아파트 9층 여자가 베란다에서 매트리스 터는 장면을, 나비 날개를 떼 아래로 던지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적고 있다.

'소주 두 병을 놓고/통닭 한 마리를 수습했다./수습한 뼈를/분리수거용 비닐봉투에 넣고/골목 어귀에 내놓았다./…/굶주린 고양이가 와서/비닐봉투를 뜯고/뼈를 수습했다.//고양이가 뜯어놓은/비닐봉투를 아내가 수습했다.'-'수습'부분

수사가 없다. 비유나 은유가 없다. 그저 지켜보고 적었을 뿐이다. 시각만 다르다. 그래, 뼈 바르는 걸 수습이라고 하지, 흩어진 물건 거두는 걸 수습이라고 하지. 시인에 의해 일상은 섬뜩한 무엇으로 탈바꿈한다.

그의 시는 요즘 한국시의 한 경향인 '생활의 발견'류와 다르다. 생판 다른 화법으로 발언하기 때문이다. 세련됐거나 고상하지도 않다. 그러나 또는 그러므로 일상은 다시 발견된다. 그 일상 속의 나는, 참으로 못났다.

'아무래도 개운하지 못한 섹스로/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은 나는/나를 닮은 개운하지 못한/시 한 편 써놓고/요리조리 살펴보며/애써 잘난 구석을 찾고 있다.'-'차고 넘치는 시'부분

시인은 현재 경남 창원의 대학가에서 인쇄소를 한다. 20년 넘게 시를 썼지만 시인이 될 생각은 못했단다. 그리고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문예지 '판' 신인상에 응모했다. 이름 때문이었다. 인쇄소 이름에도 '판'이 들어있다.

시인은 코끼리를 닮았다. 말수 적은 것도 그렇고, 덩치도 그렇고. '죽음을 예감하고 무리와 헤어져/자신만이 아는 곳으로 가서 죽는 코끼리'('별' 부분)라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순하디 순한 짐승에게 세상은 무시무시한 공포일 뿐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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