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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해결 못한 '알라딘의 램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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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시작하려다 일단 오늘 온 메일이 없나 우선 확인을 했다. 오늘도 쓰레기(스팸)메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쓰레기메일들을 일일이 가려내다 보니, 차라리 새로운 메일 계정을 하나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현 메일 주소는 이미 11년째 쓰고 있는 것이어서 웹상에 너무 노출됐기 때문이다. 어떤 사이트의 메일 계정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검색란에 질문을 살짝 던졌다. 이미 너무나 많은 질문과 대답이 나와 있었다. 용량도 크고 스팸 차단이 강화됐다는 어느 추천 사이트로 들어갔다. 한 뉴스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일본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우승 소식이었다.

발끈해서 관련 기사들을 보다 보니 이치로를 풍자한 어느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낄낄거리면서 그 사진을 보다가 나도 그런 합성을 한번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합성을 하려면 포토샵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지금 깔린 프로그램은 정식 버전이 아니라 사용 기간이 끝난 시험판 버전이었다. 어떻게 하면 정식 포토샵 프로그램을 구할 수 있는지 다시 지식 검색을 했다. P2P사이트에서 내려받아 써야 한다고 했다. 어떤 P2P가 좋은지를 검색해 가장 좋다는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깔았다. 그러곤 거기서 포토샵 프로그램을 내려받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메일을 다시 체크했다. 새로운 메일이 없어서 실망하고, 요즘 줄어만 가는 메일 숫자를 볼 때 나의 인간관계가 악화일로는 아닌지 잠시 생각하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새로운 디카를 사려는데 어떤 게 좋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고 했다. 내 디카를 소개해주고 더 좋은 걸 찾고 싶으면 지식 검색을 하거나 아니면 디카 동호회에 가입해보라고 얘기해줬다. 전화를 끊을 무렵, 문득 내 컬러링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실은 너무 오래된 음악이라 식상하다고 내게 귀띔해주었다. 역시 컬러링을 바꿔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떤 음악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음악 검색 사이트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한국 가요를 깔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장 조회 수가 많은 음악을 찾아서 들어봤다. 의외로 뛰어난 가창력에 감탄했다. 이 음악을 내 다음 영화에 쓰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CD를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쇼핑몰에서 가장 싸게 CD를 살 수 있을지를 검색했다. 몇 개의 사이트를 비교 검색한 결과 가장 싼 사이트를 찾았다. 그 사이트의 입구엔 내가 너무나도 갖고 싶었던 영화 DVD를 단돈 2000원에 판매한다는 광고가 나와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DVD를 주문하려 하자 회원 가입을 요구했다. 그래서 지루한 가입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쓰는 아이디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내기 위해 아이디를 마구 조합하다가 잠시 그 사이 메일 온 게 없나 체크하고, 친구 이름으로 날아온 반가운 메일을 발견했다. 열었더니 역시 쓰레기메일이었다. 실망한 채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 이미 져 있었다. 문득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피곤해하며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새로운 뉴스가 없나 체크하고, 메일함을 다시 한번 열었다.

그날 알라딘은 램프 속의 거인을 무수히 불러냈지만, 결국 알라딘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알라딘의 문제인가. 램프의 문제인가. 거인의 문제인가.

민규동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