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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따라 달리는 '언니'...아름다운 '평창 질주' 기대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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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올림픽에 이은 또다른 축제,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이 9일부터 18일까지 강원도 평창, 강릉, 정선에서 열린다. 평창 겨울패럴림픽은 49개국 570명 선수가 참가해 6개 종목 80개 금메달을 놓고, 역대 최대 규모 대회로 치러진다. 6개 전 종목에 선수 36명이 출전하는 '팀 코리아' 한국 선수단은 종합 10위(금 1·은 1·동 2)를 목표로 '평창의 감동'을 준비하고 있다.

'33개월째 호흡' 양재림-고운소리 #"예쁜 목걸이 걸자" 의기투합 #'2002 영광' 재현 꿈, 한상민도 기대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턴!' '업!'

지난달 22일, 강원도 정선 하이원리조트 스키장. 하얀 슬로프 위를 두 사람이 앞뒤로 함께 내려온다. 'G'라는 글자가 새겨진 형광색 조끼를 입고 앞서 달리는 가이드의 구호에 맞춰 뒤따라 선수가 기문 사이를 가뿐하게 내려왔다.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앞서 내려오는 사람은 간간이 '잘 쫓아와' '괜찮아'라며 뒤따라 오는 선수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선수는 깔끔하게 결승 지점을 통과했다.

활강 연습을 하는 고운소리(앞)와 양재림. 정선=우상조 기자

활강 연습을 하는 고운소리(앞)와 양재림. 정선=우상조 기자

두 사람은 시각장애인 알파인 스키의 선수와 가이드다. 알파인 스키 시각장애인 국가대표 양재림(29·국민체육진흥공단)과 가이드 러너 고운소리(23·국민체육진흥공단). 2015년 6월부터 33개월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둘은 평창 겨울패럴림픽에서 감동의 레이스를 준비하는 '환상의 파트너'다. 양재림은 고운소리를 '소리'라고 부른다. '소리'와 '언니'는 훈련을 마치고 "연습해온 것처럼 후회없는 레이스, 패럴림픽에서 펼치자"고 함께 다짐했다.

시각장애인 알파인 스키는 가이드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선수 앞에서 먼저 내려가면서 무선장비로 코스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이드가 내는 신호에 따라 선수는 자세를 낮추고(다운), 회전을 하고(턴), 활강을 위해 몸을 일으킨다(업). 선수와 가이드의 거리가 기문 2개를 초과하면 실격돼 가이드는 수시로 뒤에 있는 선수 상황을 점검해야 한다.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시속 60km로 활주하는 알파인 스키. 양재림이 스키를 탄 건 5세 때부터다. 태어날 때 체중 1.3kg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산소과다로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 3급이다. 10여 차례 수술로 오른쪽은 조금이나마 볼 수 있지만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균형 감각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부모님의 권유로 스키를 탔던 양재림은 취미삼아 매년 겨울마다 스키장을 찾았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으로 스키를 탄 건 2009년 대학 입학 후. 스키를 더 배우고 싶어 대한장애인스키협회를 찾았다가 아예 선수 권유를 받았다. 그는 2011년 2월 전국장애인겨울체전을 통해 데뷔전을 치렀고, 2014년 소치 겨울패럴림픽 때 대회전 4위에 올라 주목받았다.

떠오르는 기대주, 양재림에게 '소리'가 함께 한 건 2015년 9월이었다. 앞서 4차례 가이드를 바꿨던 양재림을 위해 협회가 그해 6월 가이드를 공개 모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스키를 타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뛰던 고운소리는 미래를 고민하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던 참이었다. 고운소리는 "재림 언니의 소치 패럴림픽 경기 영상을 앞서 본 적이 있었다. 언니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함께 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뽑히고 안 뽑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의지로 처음 무언가에 도전한 것이라 의미도 컸다"고 말했다. 양재림은 "내가 성격이 좀 내성적이라 그런 걸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다. 처음 만나면 수줍어서 말을 안할 수 있었는데, '소리'는 처음부터 먼저 말도 건네고 웃음도 많고 성격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함께 했다"고 말했다.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둘은 서로 성격이 정반대다. 양재림이 잔잔한 발라드풍 노래를 좋아한다면 고운소리는 힙합, 댄스 음악을 즐겨듣는다. 그러나 서로 다른 스타일이 이들에겐 장점이다. 양재림은 "내가 시합 때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소리가 워낙 적극적이어서 시합 앞두면 긴장을 풀어주려고 많이 노력한다"고 말했다. 고운소리는 "언니를 통해서 나도 더 침착해지는 걸 배운다"고 말했다. 3년 가까이 함께 지내다보니 때론 고운소리가 양재림을 '재림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재림은 "그만큼 가족같이 친하니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장비를 들고 이동하는 양재림(왼쪽)과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함께 장비를 들고 이동하는 양재림(왼쪽)과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이들이 가족같이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공교롭게 양재림이 힘들어했던 시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2015년 8월 함께 처음 출전한 남반구 대회에서 2관왕(회전·대회전)에 오를 만큼 실력이 좋았다. 그러나 2016년 1월은 악몽같았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양재림이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재활해서 다시 슬로프에 서기까진 10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고운소리는 외롭게 부상과 싸우던 양재림의 힘이 돼줬다.

고운소리는 "언니가 1주일에 3-4번 병원가면 혼자서 식사해야 하고, 외롭게 보내야 했다. '급하게 복귀하는 것보단 천천히 하나하나 올라가자'고 이야기하면서 힘이 돼줬다"고 말했다. 양재림은 "소리가 병원에 자주 찾아와줬다. 오랫동안 파트너와 떨어지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데, 스키 얘기도 더 많이 나눴다. 복귀하고나서도 기량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해 1월 슬로베니아 월드컵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다시 떴다. 또 2016년엔 이들의 스토리를 소재로 한 이동통신사 광고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양재림(왼쪽)과 가이드 고운소리. 정선=우상조 기자

친언니를 따라 대학(이화여대)에서 미술(동양화)을 전공한 양재림은 "패럴림픽을 준비하면서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패럴림픽 뒤엔 다시 그림도 그리고 싶다"고 했다. 4년 전 메달을 따지 못한 게 아쉬워 평창 대회에 재도전하는 양재림은 "코스는 머릿 속에 다 그렸다. 욕심을 버리고 준비한 것만 100% 발휘하는 경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운소리는 "3년동안 힘들게 준비했는데 언니가 걱정없이 나만 믿고 뛸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양재림은 고운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 끝났을 땐 예쁜 목걸이 하나 걸자"고. '예쁜 목걸이'는 메달이다. 4개 종목(회전·대회전·수퍼대회전·수퍼복합)에 나설 둘은 패럴림픽이 끝난 뒤, 1주일 넘는 제주도 여행과 고운소리가 사는 경기도 구리의 낙지요리 맛집을 가는 소박한 꿈도 함께 약속했다.

슬로프를 내려오는 한상민. 정선=우상조 기자

슬로프를 내려오는 한상민. 정선=우상조 기자

◇ '부상 투혼' 준비하는 '베테랑' 한상민= '팀 코리아'가 알파인 스키에서 메달을 기대하는 또다른 선수는 좌식 부문의 '베테랑' 한상민(39)이다. 생후 1년만에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됐던 그는 고등학생 때 교사의 권유로 접한 스키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처음 출전했던 2002년 솔트레이크 패럴림픽 때 대회전 은메달을 땄다. 한국 겨울 패럴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이었다. 2006년과 2010년 대회에도 출전했던 그는 2014년엔 인천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휠체어 농구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던 경력도 갖고 있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한상민은 "인생의 절반을 운동과 함께 했더라. 운동엔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대자연 속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알파인 스키, 함께 어우러져서 땀흘리는 휠체어 농구 모두 매력있는 스포츠"라고 말했다.

한국 겨울 패럴림픽 통산 첫 메달리스트 한상민. 정선=우상조 기자

한국 겨울 패럴림픽 통산 첫 메달리스트 한상민. 정선=우상조 기자

한상민은 평창 패럴림픽을 앞두고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달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월드컵을 앞두고 스피드 경기 훈련을 하다 넘어져 왼쪽 어깨를 다치고, 뇌진탕 증세까지 겪었다. 앞서 어깨 수술을 세 차례나 했던 그는 말 그대로 투혼을 발휘하며 평창 패럴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40세를 앞둔 그는 "어쩌면 마지막 패럴림픽이 될 수 있다. 어떤 메달을 따든 값어치는 모두 똑같을 것 같다. 국내에서 열리는 패럴림픽에서 16년 만에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선=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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