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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때론 ‘까칠한 주열씨’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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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하현옥 경제부 기자

하현옥 경제부 기자

중앙은행은 독특하다. 정부 기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통화의 독점 발행권을 부여받았다. 그 권한을 통해 금리를 조절하고 통화 흐름을 결정한다. 중앙은행장의 한 마디에 금융 시장이 춤추는 이유다. 임명된 것만으로 엄청난 권한을 쥐는 만큼 중앙은행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불린다.

‘장기 집권’도 비일비재하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19년간 ‘세계의 경제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 인민은행장은 16년째 직을 수행 중이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의 연임 안도 최근 의회에 제출됐다.

중앙은행장의 ‘장기 집권’이 독재로 폄하되지 않는 건 통화정책의 안정성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방패 덕이다.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임은커녕 한국은행 총재가 4년 임기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순 전 총재는 김영삼 정부 시절 한은 독립성과 경제정책을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으며 1년 만에 물러났다. 김명호·이경식 전 총재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한은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이주열 현 총재가 차기 총재 후보로 지명됐다.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에도 전 정권에서 임명한 총재를 유임시키는 의미 있는 선례도 남기게 됐다.

이 총재는 그동안 정부와 긴밀한 공조를 해왔지만,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임명권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맞설 때는 각을 날카롭게 세워야 한다.

1951년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의 물가가 올랐다. 당시 토마스 매케이브 Fed 의장은 금리 인상을 추진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경기를 살리고 싶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3년 차인 매케이브를 물러나게 했다. 대신 말 잘 들을 것 같은 재무부 차관보 윌리엄 마틴을 Fed 의장으로 임명했다.

트루먼의 오판이었다. 마틴은 Fed 의장이 되자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목적에 맞게 긴축 정책을 펼쳤다. 트루먼은 이런 마틴을 “배신자”라고 몰아붙였지만, 마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틴이 단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 필요할 때는 정부와 협조하는 절묘한 통화정책을 펼치며 19년간 의장직을 수행했다.

새로운 4년을 앞둔 이 총재는 때론 ‘까칠한 주열 씨’가 돼야 한다. 그게 중앙은행 총재의 모습이다.

하현옥 경제부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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