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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용기가 되자"…'여성의 날' 앞두고 광장에 울려퍼진 미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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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이 소개시켜주는 남자랑 결혼해, 너는 내가 아끼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친구가 제 무릎에 앉아있는 걸 보고 '그 자리 탐난다'고 했고 지진이 났을 때는 '네가 시집은 가보고 죽어야 할 텐데'라고 했습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차별과 혐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은성, 고등학생)

4일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한 주부가 아들과 함께 참가해 'Me Too' 피켓을 들고 있다. 최정동 기자

4일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한 주부가 아들과 함께 참가해 'Me Too' 피켓을 들고 있다. 최정동 기자

"만나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은 전 남자친구가 저를 사칭하는 계정을 만들어 제 얼굴을 음란사진에 합성해 올리고, 제 연락처나 주소 등을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3번이나 고소 접수를 거부당했습니다. 사이버 성폭력이 얼마나 큰 범죄이며,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것인지 인식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피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익명 요청)

"19년 동안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는 경찰이었습니다. 같은 지구대에 근무하던 후배 여경이 겪은 성추행 사건을 해결하려다 '너 때문에 우리 치안성과 꼴찌된다'며 성희롱을 조작한 여경, '꽃뱀 여경'으로 낙인찍혀 살아왔습니다. 정작 가해자는 경징계만 받고 다른 경찰서로 갔습니다. 미투 이후 그간 말 못하고 혼자 힘들었을 수많은 분에게 용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임희경, 경남지방경찰청 소속 경찰)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각계각층의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손에 든 마이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따금 감정에 북받친 듯 여성들은 발언을 멈추었다. 그러면 무대를 지켜보던 다른 여성들이 박수와 환호로 응원을 보냈다.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신호였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들 'Me Too' 피켓을 들고 있다. 최정동 기자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들 'Me Too' 피켓을 들고 있다. 최정동 기자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한국여성단체연합 주관으로 제34회 한국여성대회 '내 삶을 바꾸는 성평등 민주주의'가 4일 열렸다. 광장에 모인 2000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들은 '#MeToo #WithYou' 피켓을 들거나 머리띠를 쓴 채 대회에 참가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8명의 시민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샤우팅' 행사가 진행됐다. 행사에는 한 진보정당의 분회장으로 일했다는 이애란(18)양이 "정당 내 간부가 여성 정당원의 외모를 비하하는 글을 올려 문제를 제기했더니 오히려 정당은 '당을 위해 의견을 덮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나를 비난했다"며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진보정당이 오히려 미투운동을 조롱하고 음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

앞서 재직시절 다른 교수에게 당한 성폭력 문제를 폭로했던 남정숙 전 성균관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도 무대에 올라 "미투는 권력형 성폭력이다. 피해자는 단독으로 절대 저항할 수 없다. 가해자 처리가 끝도 아니다. 정치와 제도가 보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개인 참가자 배윤민정(33)씨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김정연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개인 참가자 배윤민정(33)씨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김정연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Me Too' 피켓을 등에 달았다. 홍상지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Me Too' 피켓을 등에 달았다. 홍상지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옆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홍상지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옆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홍상지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손피켓을 만들고 있다. 홍상지 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손피켓을 만들고 있다. 홍상지 기자

무대 밑 광장에는 여성단체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부스가 마련돼 있었다. 시민들은 포스트잇에 미투를 응원하는 글귀를 적거나 성폭력·성평등 관련 설문조사에 참여하고 즉석에서 자신이 직접 들 피켓을 만들기도 했다.

경남 창원에서 온 조아라(33)씨는 "결혼하고 가부장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불합리함을 느끼게 됐고 이게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걸 알고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살과 7살된 딸을 데리고 나온 김현식(41)씨는 "두 딸이 커서는 이런 세상 말고 좀 바뀐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고 했다.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정연 기자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정연 기자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정연 기자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정연 기자

참가자들은 무대 발언이 끝난 뒤 광화문 광장에서 안국역, 종각역을 거쳐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오는 행진을 했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폭로할 수 없는 구조를 부수자''연대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행진 이후 지난 한 해 성평등에 기여한 이들에 대한 시상식도 열렸다. '올해의 여성운동상'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와 조력자에 대한 징계는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끌어낸 르노 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박모씨, '성평등 디딤돌상'은 초등성평등연구회를 꾸린 최현희 교사와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불을 지핀 '고발자5' 등 6팀이 수상했다. 반면 '성평등 걸림돌'로는 여성을 뽑지 않기 위해 면접순위를 조작한 한국가스안전공사, 직장 내 성폭력 피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던 한샘 등 5곳이 선정됐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금 이순간에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차별과 동조, 침묵의 구조가 문제였다"며 "이제는 여성들의 외침에 국가가 응답할 차례다"고 강조했다.

홍상지·김정연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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