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피·땀 없이 예술이 나오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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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에서 멋진 골인 장면을 보면서 '예술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있는가. 짐작하기로 그 선수는 예술축구를 선보이기 전에 수만 번의 볼을 차고 또 찼을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코에 와 닿는 향기, 더구나 혀에 닿았을 때 저려오는 기쁨 때문에 '맛이 예술이네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기억은 없는가. 그 요리사는 '예술적' 음식을 고객에게 선사하기 위해 수만 개의 감자를 썰고 양파를 벗기며 눈물깨나 흘렸을 것이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재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훈련되기도 한다. 정열은 예술의 목표 달성을 위해 희생하고 극기하도록 만드는 에너지원이다. 정열이 부족한 재능이나 재능이 부족한 정열은 돈과 시간을 충분히 만나도 번듯한 예술을 생산하지 못한다.

문학예술과 영상예술은 상상의 디테일보다는 동선의 스케일에서 차이가 난다. 소설가는 불과 몇 줄로 수 천 명의 군사를 절벽에서 싸우게 할 수 있지만 영상으로 옮기는 연출가는 그들을 모아 입히고 분칠하고 칼을 쥐어주고 동작을 지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함께 움직일 절벽을 찾아야 하고 카메라와 조명.마이크는 높거나 낮은 곳에 숨도록 배치해야 한다.

HD미니시리즈 '다모'는 모처럼 시청자들로부터 '드라마가 예술이네'라는 탄성을 이끌어냈다.

상술이 춤추는 TV마당에서 예술을 만나는 기쁨은 크고 소중하다. 시적인 대사를 자유롭게 구가하는 작가(정형수)의 이력을 보니 이 작품 역시 시대고(時代苦)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체험한 개인과 사회, 혹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 원작만화(방학기)의 캐릭터들에 덧입혀져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TV드라마가 예술이 되려면 여기에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개 성취의 대열에 동행하는 TV 기술자는 엔지니어 겸 아티스트다. 곁에서 보면 그들은 그저 손으로 기계를 움직이는 듯하지만 실은 고도의 안목으로 그림과 소리를 창조해내는 중이다.

'다모'에서 무술(武術)은 무술(舞術)의 경지로 다가와 시청자들은 마치 숲 속의 무도회장에 초대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검술이 예술이 된 까닭은 HD캠.플라잉캠.모빌캠. 수퍼슬로카메라 등 다양한 기술장비와 그것들을 능숙하게 운용한 제작진의 솜씨 덕분이다.

'다모'는 젊은 프로들이 의기투합해 쌓은 공든 탑이다. 미니시리즈 사상 최대 제작비(회당 2억원), 최다 스태프(1백여명), 최장 제작기간(1년이 넘는 사전 제작기간, 올 2월 11일 촬영 시작)에다 전봇대가 없는 장소를 찾느라 6개월 동안 전국의 구석구석을 훑고, 심지어 지난 월요일(1일) 방송된 동굴 폭발장면을 찍을 때는 해당 군청에 '촬영 중 죽어도 좋다'는 각서까지 쓰고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다모'가 연출 데뷔작인 만 서른 세 살의 이재규 PD는 수중 신을 촬영할 때 직접 물에 뛰어들었다가 다친 머리의 상처를 훈장처럼 지니고 있다.

제작진이 독을 품으면 시청자는 사랑을 품는다. 팬들 중 일부는 인터넷 사이트 캔들러브(www.candlelove.co.kr)에 모여 "채옥이를 죽이지 말라"며 기원하는 중이다. 제작진이 띄운 간절한 연애편지에 시청자가 촛불로 화답하는 모습이다. 이PD를 만나면 표정을 가다듬고 이 말부터 할 참이다. "기쁘냐? 나도 기쁘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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