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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 한수] 성내천 둘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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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윤경재의 나도 시인(3)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 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편집자>

성내천 둘레길 [사진 윤경재]

성내천 둘레길 [사진 윤경재]

성내천 둘레길

성내천이 뒤척이면 여럿이 깨어 나온다
상추 애호박 깻잎 파 게다가 총각무
하루 치보다 조금만 더 따다가 늘어놓은 둑방길
그녀의 싱싱한 반환점을 앞장세우고
마음속 출사 포인트를 찾아
서늘한 빛의 흔적을 담는다

늘 위가 비어 있다는 재두루미
땅도 비어서 더 넉넉한 공한지
흐드러진 구절초 패랭이 부들 수선화

한 숟갈이라도 더 욕심내면
걷고 뛰기 불편한 둘레길
영이 가난한 두루미 닮기로
부리질 멈추고 외다리 세운 채 넋을 잃는다
난장 길에 몸과 마음 널어놓는다

물길은 늘 옆엣 길보다 온도와 소리가 나직하다

[해설] 한쪽이 과하면 다른 쪽을 풀어주는 '음양 해소법'

서울은 여러 가지로 특색이 있는 도시이다. 산과 물이 멋지게 어우러진 도시이다. 가까이로는 북악산, 인왕산, 남산이 도심을 감싸고 또 조금 멀리 북한산, 도봉산, 남한산, 청계산이 크게 두르고 있다. 서울 한가운데를 청계천과 한강이 흐르는데 배산임수의 명당이 아닐 수 없다. 한강으로도 여러 지류가 흘러든다. 안양천, 양재천, 탄천, 성내천 등. 이 모든 자연 생태계가 서울을 보호하며 숨 쉴 여유를 준다. 서울을 둘러쌓은 산과 내를 하나로 이어 157km나 되는 서울 둘레길을 만들었다.

성내천 둘레길. 여름철에는 성내천 물가에 수영장을 열어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사진 윤경재]

성내천 둘레길. 여름철에는 성내천 물가에 수영장을 열어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사진 윤경재]

서울 둘레길 중 하나인 성내천 둘레길. 성내천은 남한산 밑자락인 마천동에서 나와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을 지나 올림픽대교 밑으로 합류한다. 성내천은 사시사철 마르는 일이 없다. 성내천 주위에 너른 생태보전지역인 공한지가 있고 그 안에 방이동 생태공원이 있다. 생태공원 안에는 천연 늪이 있어 각종 철새가 날아오고 재두루미, 백로, 오색 딱따구리, 꾀꼬리, 박새 등이 살고 있다. 여름철에는 성내천 물가에 수영장을 열어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때맞추어 춤추는 음악 분수도 남녀노소를 불러 모은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분리되어 안전하고 여유롭다.

날이 좋으면 성내천 둑길에는 무척 많은 사람이 새벽부터 나와 움직인다.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온갖 채소가 좌판에서 조용히 손님을 부른다. 들꽃집도 일찌감치 문을 연다. 난장이 선 듯하다. 다만 내 귀에는 무엇도 소란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뒤척임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흔한 야채 트럭 확성기 소리와 자치단체가 공치사하는 음악 소리조차 없다. 여북하면 ‘송파 소리길’이라 이름 지었을까.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 소리 없는 곳에서 소리를 들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가에는 두루미, 오리, 비둘기가 놀고 잉어는 물속에서 헤엄친다. [사진 윤경재]

물가에는 두루미, 오리, 비둘기가 놀고 잉어는 물속에서 헤엄친다. [사진 윤경재]

물이 졸졸 흐르는 성내천 길은 주위보다 온도가 낮고 일정하다. 그래서 사철 사람들이 모여든다. 걷고 달리며 운동하고, 산책하며 책도 읽는다. 물가에는 두루미, 오리, 비둘기가 놀고 잉어는 물속에서 헤엄친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정중동과 동중정의 꼬임을 맛볼 수 있다.

현대인은 두뇌를 많이 쓴다. 그것도 일정한 틀 아래 반복적으로 사용하기에 피로감이 누적되어 만병이 생긴다. 이런 때 흔히 머리를 비우라는 충고를 하는데 어떻게 비워야 좋은지 그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내려놓으라 하니 그 말이야 정말 바른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란 말인가?

한의학에서는 기를 순환시킨다는 원리로 설명한다. 마음 가는 곳에 몸도 따라가는 법이다.

몸에서 많이 사용되는 곳일수록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머리를 많이 쓴다면 그곳에 집중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산소와 영양분이 가득 든 피가 몰려들었을 테고, 에너지를 사용한 뒤에는 그 찌꺼기와 흔적이 남게 된다. 인간은 온혈동물이라 피가 쏠리면 열이 나게 마련이다. 열이 나면 피의 흐름이 탁해져 굳는다. 이런 현상을 어혈이 쌓인다고 부른다. 그것을 푸는 방법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음양의 법칙을 이용하는 것이다. 위의 병은 아래로 아래 병은 위로, 열은 서늘하게 냉증은 따듯하게. 이것이 원칙이다. 즉, 머리에 쏠린 피는 다리 쪽으로 내려 풀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걷고 뛰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두냉족난’이라 하여 머리는 서늘하게 다리는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이 건강 비법이라 가르쳤다.

정신이 과로했으면 육체를 움직여 적당한 운동으로 정신피로를 풀어주고, 육체가 과로했을 땐 정신을 느긋하게 풀어주는 게 바로 음양 해소법이다. 정신을 푸는 방법으로는 먼저 눈을 감아 에너지 손상을 막고, 명상이나 독서, 음악 감상이 좋다. 그래서 장자는 걸으면서 논다는 뜻인 소요유(逍遙遊)를 지었고, 칸트는 시간 맞추어 숲길을 산책하며 자신의 철학을 완성한 것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몸이 묵직할 때, 가볍게 옷을 걸치고 둑길에 나간다. [사진 윤경재]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몸이 묵직할 때, 가볍게 옷을 걸치고 둑길에 나간다. [사진 윤경재]

고맙게도 내가 사는 동네가 바로 성내천 주변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몸이 묵직할 때 난 그냥 가볍게 옷을 걸치고 둑길에 나간다. 왕복 6km 정도 되는 거리를 약간 빠르게 걷는다. 철마다 바뀌며 다가오는 풍광이 얼마나 신선한지 모른다. 그런 장면을 기대하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가끔은 들꽃을 따다가 집사람에게 아침 선물로 주면 무척 좋아한다. 돌아오는 길에 싱싱한 푸성귀를 사다가 아침밥에 곁들이면 달아난 입맛이 살아난다.

바쁜 현대생활 속에서 우리가 마음먹고 둘레를 살펴보면 의외로 정체된 열기를 낮추어주며, 내면의 나직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가 널려 있다. 그런 곳을 찾아내어 먼저 몸으로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위 환경에 눈 돌려보자. 지금 사는 곳이 어디든지 그런 데가 나타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곳을 만난다면 우리가 비록 대붕은 아니지만, 소요유를 즐길 넉넉함을 얻게 되리라.

윤경재 한의원 원장 whatayun@hanmail.net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www.joongang.co.kr/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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