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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그 곳이 알고 싶다 창경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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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이라. '춘향전'의 이몽룡이 과거를 치를 때 나왔던 시제입니다. '춘당의 봄빛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태평성대'란 뜻이죠. 임금의 덕을 칭송하란 얘깁니다. 궁금해지네요. 그럼 '춘당'은 어디일까요. 대체 어디의 봄이기에 국가고시인 과거 문제에도 등장했을까요.

짧게 수소문했습니다. 아하! '춘당'은 궁궐 안에 있군요.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후원의 작은 언덕, 바로 과거를 치르던 장소입니다. 옆에는 '춘당지'란 조그만 연못도 있었군요. 이처럼 궁궐은 아기자기한 '비밀'들로 가득합니다. 무심코 지났던 전각의 뜰, 나무 한 그루, 조그만 우물 하나에도 나름의 사연이 '쌕쌕' 숨 쉬고 있습니다. 때로는 희극으로, 때로는 비극으로 흘렀던 궁궐의 삶과 잊힌 역사의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죠.

봄이네요. '춘당의 봄빛'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기왓장이나 바위 틈에 숨어 있는 궁궐의 사연을 들추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반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연은 지금도 당신을 울립니다. 바스락거릴 만큼 색이 바랜 애환들이 여전히 심장을 때립니다. week&은 이번 주 창경궁의 봄을 찾았습니다. 아기자기한 궁궐과 수목이 우거진 후원,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어 가족 나들이에는 제격입니다.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게 1909년입니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죠. 아직도 창경궁을 '수학여행지'나 '동물원'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주말에 잠시 짬을 내세요. 창경궁이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고 있습니다.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도움말 주신 분=우리궁궐지킴이 박상인씨(www.palace.or.kr)

*** 수수께끼 일곱 마당

1.왜 남향이 아닐까 ?

음식을 만들 땐 간을 보잖아요. '짜다''맵다'할 때 간 말이죠. 궁궐도 간이 맞아야 제 맛이 납니다. 궁궐을 제대로 보려면 '3간'을 맞춰야 합니다. 그 세 가지 간이 뭐냐고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입니다. 어느 시대에, 어떤 왕이, 궁궐의 어디에서 뭘 했는지를 짚어 보세요. 그럼 가슴이 '싸~아'해지는 궁궐의 제맛이 느껴집니다.

아, 저기 창경궁의 돌담이 보이네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창경궁은 동향입니다. 사대문 안의 궁궐은 대부분 남향입니다. 아파트도 남향이 더 비싸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창경궁만 동향일까요.

이유는 '출생 배경'입니다. 왕보단 '윗사람'들을 위해 지었거든요. 처음에는 세종이 은퇴하신 아버지 태종을 위해 조그만 거처(수강궁)를 마련했어요. 그걸 성종 때 한껏 키워 '재건축'한 게 창경궁입니다. 성종 역시 조모인 정희왕후와 생모인 인수대비, 숙모인 안순왕후 등 윗전을 모시기 위해 지었답니다. 대비는 왕의 왼쪽에 앉는 것이 법도라네요. 그래서 왕이 머물던 창덕궁의 왼쪽에 동향의 궁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창경궁은 왕보단 '왕의 여자'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 됐죠. 그래서 '여인천하'의 갖가지 암투가 벌어진 곳도 바로 창경궁입니다. 어찌 보면 슬프고, 어찌 보면 외로운 공간이죠. 궁의 숱한 여자들이 딱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았으니 말이죠.

2.정문 앞 개울의 의미는 ?

표를 샀습니다. 1000원(성인)이네요. 정문인 홍화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순간 수백 년의 세월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바로 앞에 조그만 개울이 흐릅니다. 작다고 얕보진 마세요. 그게 바로 '금천(禁川)'입니다. '앞에는 물, 뒤에는 산'. 그래야 명당이죠. 이 개울이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위한 물입니다. 삼청공원 뒤편의 옥류천에서 흘러드는 자연천이죠. 그래서 별칭도 '명당수'. 그럼 산은 어딨느냐고요? 멀리 북악산을 보세요. 높다란 매봉이 창경궁 전각들 위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놀랍네요. 강물이 아닌 개울물을 터 명당의 조건을 갖추다니 말이죠.

걸음을 옮겼습니다.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면 명정문, 다음엔 명정전이 나옵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입니다. 그런데 묘하네요. 홍화문~명정문~명정전을 잇는 통로가 일직선이 아니라 중간에서 꺾어져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조선시대 궁궐 건립의 교과서였던 중국의 '주례'에도 임금의 앞길은 반듯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는 대요.

이유가 뜻밖입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창경궁은 작은 궁궐입니다. 궁궐 정문인 홍화문에서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던 명정전까지 거리는 100m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당시 활의 사정거리는 110m에 달했다고 하네요. 궁궐의 담장 밖에서 쏴도 정전이 사정권에 들어가는 셈이죠. 실제 명정전에선 왕이 신하들과 천막을 치고 큰 잔치를 열기도 했으니 위험천만이었겠죠. 그래서 표적을 흩어 놓은 것이라 합니다. 고층 건물이 없던 당시, 밖에서 활을 쏘면 중간에 솟은 명정문을 향해 쐈을 테니까요. 그럼 명정전의 우측으로 화살이 빗나갔겠죠. 일리가 있나요?

다른 주장도 있어요. 궁궐이 좁아 답답해 좀 길어 보이게 하려고 통로를 꺾었다는 설명입니다. 어쨌거나 자로 잰 듯한 반듯함보단 더 끌리네요. 뭐, 비뚜름함에서 풍기는 자연미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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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의 봄빛 … 마마님들 속삭임 들리는 듯

3.용마루가 없는 건물은 ?

궁궐은 건물마다 '계급'이 있습니다. 가장 지체가 높은 건물에는 '전(殿)'자가 붙습니다. 그 다음은 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의 순입니다. '-전(殿)'자는 왕과 왕비가 쓰는 건물에만 붙였죠. 사가에선 절대 '전'자를 붙일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그럼 궁궐의 지붕은 무슨 색일까요? 맞아요, 검정이죠. 원래는 정전이나 임금이 쓰는 주요 건물에는 푸른 기와를 얹었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도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에는 푸른 기와를 얹었다네요. 푸른 기와라, 청기와네요. 아하! 그러고 보니 '청와대(靑瓦臺)'란 이름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뿌리가 여기에 있었네요.

원래 궁 안에는 잔디도 없었어요. 잔디는 일본식 정원 양식에서 주로 사용되죠. 창경궁의 잔디도 대부분 일제시대 때 깔린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 잔디는 주로 조상의 무덤에나 두르던 풀이었죠. 요즘 궁 안의 잔디밭은 옛날에 건물이 있던 터로 보면 됩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동궐도'를 보면 궁에는 건물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 왕후의 처소를 한눈에 찾을 수 있을까요? 구중궁궐인데 어림도 없다고요? 그럼 지붕을 보세요. 궁궐 지붕에는 모두 왕을 상징하는 용마루가 있습니다. 그런데 왕후의 처소에만 그게 없어요. 창경궁에도 통명전에만 용마루가 없거든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통명전'은 왕과 왕후의 침전이었으니 왕자를 잉태하는 장소였죠. 왕이 '용'이면 왕자도 '용'이죠. 그런데 지붕에 용마루가 있으면 용이 어린 용을 눌러 기운이 좋지 않다고 여겼다네요.

이뿐만 아닙니다. 왕후의 처소는 종종 궁중암투의 표적이었죠. 일제시대 때 통명전과 경춘전 지붕을 보수하는데 서까래 밑에서 동물의 뼈와 저주를 내리는 부적이 적잖이 나왔다고 합니다. 경춘전도 여러 왕후가 살았던 곳이죠. 으~, 섬뜩해지네요. 권력과 모함, 시기와 질투가 뒤범벅된 궁중의 사랑이 참 살벌합니다.

◆ 막간 퀴즈

▶이몽룡이 장원 글발 날리던 곳

▶상대를 저주할 때 썼던 동물뼈와 부적이 쏟아진 곳

▶일제가 개념 없이 심은 나무 두 가지

4.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장소는 ?

문정전 뜰 앞에 섰습니다. 바람이 부네요. 눈을 감았습니다. 들리세요? 전각의 기둥과 주춧돌 사이로 삐져나오는 울음소리 말입니다. 이곳은 아비가 자식을 죽인 비극의 장소입니다. 바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곳이죠(일부 다른 장소라는 설도 있음).

음력으로 윤 오월이었으니 한여름이었죠. '임금 몰래 관서지방을 여행했다' '궁녀를 죽였다' '여승을 몰래 궁에 들였다' 등의 상소가 잇따르자 영조는 격노했죠. 그리고 세자를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노한 영조는 칼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결하라!"고 명했죠. 세자는 용포를 벗은 채 엎드려 빌었습니다. 결국 영조는 "쌀 담는 궤를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담장 밑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듣던 세자빈(혜경궁 홍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혜경궁 홍씨는 급히 세손(정조)을 보내 간청케 했습니다.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노한 영조는 "나가라!"며 일언지하에 손자를 내쳤다고 합니다.

이 얘길 들은 세자빈은 칼을 꺼내 목숨을 끊고자 했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불발에 그쳤죠. 세자빈은 직접 담장 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담장이 여기 어디쯤이었을까요. 지금은 봄볕만 말없이 담장을 때립니다. 그때 안에서 세자의 절규가 들렸습니다.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한중록)" 영조는 꿈쩍도 않았습니다.

결국 세자는 뒤주 안으로 들어갔죠. 세자빈은 영조의 마음을 돌리려고 담장 밑에서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뒤주의 숨구멍까지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물도 주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세자는 바로 이곳에서 첫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뒤주는 동궁 앞 선인문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5.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나무는 ?

뒤주에 갇힌 지 9일째, 영조는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뒤주를 옮기던 발자국을 더듬어 선인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세자는 죽기 직전, 여드레 밤낮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뒤주가 놓였던 자리는 이쯤이었을까요. 아니면 저기 저쯤이었을까요. 조심조심 땅을 밟아 봅니다. 여기서 세자는 "살려달라. 살려달라" 외치다가 힘이 빠졌겠죠. 그리고 더위에 지쳐, 목마름에 지쳐, 배고픔에 지쳐 죽어갔겠죠.

244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선인문 앞에는 '역사의 증인'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입니다. 순조 때 그림으로 추정되는 '동궐도'에도 선인문 앞에 이 회화나무(빨간 점선 원)가 그려져 있습니다. 나무는 들었겠죠. 그리고 봤겠죠. 밤새 흐느꼈을 세자의 울음과 비극의 뒤주를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나무는 기묘하게 꼬인 채 낮게 낮게 자라고 있습니다. 마치 고통스러운 기억을 못 이겨 온몸을 비튼 듯이 말이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정조는 훗날 창경궁 가장 높은 언덕에 자경전(고종 때 화제로 소실)을 지었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처소를 거기에 마련했죠. 그곳에선 종묘로 들어가지 못한 사도세자의 사당(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이 한눈에 보였으니까요. 어머니의 한 맺힌 그리움을 달래기 위함이었겠죠.

6.왜 앵두나무가 많을까 ?

창경궁을 거닐다 보면 유독 개암나무가 많아요. 이유를 아세요? 개암나무는 귀신을 쫓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잎이 달걀처럼 생긴 귀룽나무도 귀신을 쫓아내긴 마찬가지죠. 그래서 깊은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귀룽나무도 궁궐에선 쉽게 눈에 띄죠.

창경궁 후원과 전각의 뒤뜰에는 여기저기 앵두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다른 궁궐보다 창경궁에 유달리 앵두나무가 많은 이유는 뭘까요? 세종대왕이 앵두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랍니다. 치아가 좋지 못했던 세종대왕은 씹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앵두를 아주 즐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 문종이 궁궐 곳곳에 앵두나무를 심도록 명했다고 하네요.

창경궁의 나무는 모두 100종이 넘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나무나 심었던 건 아니죠. 궁궐에는 '심어도 되는 나무'와 '심어선 안 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가시가 있는 나무나 속이 빈 오동나무는 심을 수 없었어요. 또 색깔이 변하는 단풍나무도 '금지 수목'이었죠. 왕을 향한 마음이 변해선 안 되니까요. 그래서 궁궐에는 단풍나무처럼 생겼지만 색깔이 변하지 않는 신나무(단풍나무과)를 심었다고 하네요.

아니라고요? 창경궁에서 붉은 단풍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창경궁에는 봄부터 잎이 붉게 물드는 '홍단풍'이 분명 심어져 있습니다. 일명 '노무라 단풍'이라고 불리는 단풍나무죠. 이 나무는 일제가 심은 것입니다. 이후 일제의 흔적을 지우겠다며 궁 안의 벚꽃 나무를 베면서도, 노무라 단풍은 미처 보지 못했던 거죠.

7.영조가 아끼던 우물은 어디 ?

왕후의 침전인 통명전 뒤에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사각 반듯한 우물 옆 돌담에는 한자로 '열천(冽泉)'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가 시리도록 맑은 물'이란 뜻이죠. 영조가 직접 쓴 글씨입니다. 영조는 왜 어필을 남길 만큼 이 우물에 애정을 쏟았을까요.

바로 어머니 때문입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입니다. 무수리는 궁궐의 잡다한 일을 도맡았던 천민 계급입니다. 벼슬과 월봉이 주어졌던 상궁이나 궁녀와는 완전히 신분이 달랐죠. 신분패를 차고 궁궐로 출퇴근했던 무수리는 나이가 차면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죠.

이 우물은 숙빈 최씨가 무척 아꼈던 곳이라 합니다. 무수리 시절, 그는 아마도 물 긷는 일을 담당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럼 무수리가 어떻게 왕자를 낳았을까요. 숙종(영조의 아버지)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죠. 밤 늦게 정화수를 떠놓고 통명전 앞뜰에서 인현왕후를 위해 치성을 드리던 최 무수리를 숙종이 발견했죠. 그래서 낳은 왕자가 영조입니다. 그래서인지 영조의 출생 콤플렉스는 뿌리가 깊었다고 하네요. 궁궐의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많았으니 오죽했겠어요.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중전의 자리에 앉았던 장희빈도 궁녀 출신이지, 무수리 출신은 아니었죠. 그래서 우물은 더욱 애틋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심정이 그대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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