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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同行'-고령사회로 가는 길 ③ '아침이 기다려지는 곳' 경로당 무한 진화 시작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타 교실 열어 음악 봉사활동부터 거리 버스킹까지
청국장·된장 만들어 판 수익금은 장학금으로 환원도
1-3세대 소통하는 개방형 경로당 전국적으로 증가 추세

"왜 이렇게 헤매시나요? 코드가 그게 아니잖아요. 연습을많이 안 하셨나?(웃음)"
“전에 하던 것하고 자꾸 헷갈려서 그래요. 다시 잘 해볼게요.”

2월 8일 오후 3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우방아이유쉘 아파트(이하 우방아파트) 관리사무동 1층. 기타 연주음과 함께 교육생들의 실수를 지적하는 나지막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타 강습소를 방불케 하는 이곳은 우방아파트 안에 있는 경로당이다. 경로당에서는매주 1~2회씩 기타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우방아파트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60대 이상 노인들이다. 경로당 사무를 총괄하는 박명순(76) 사무장이 기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충청북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1960년대부터 취미로 기타를 치기 시작해 벌써 50여 년이나 됐다는 박 사무장의 기타 실력은 준프로급이다. 이날 모인 노인들은 박 사무장을 포함해모두 열 명으로 중급반 프로그램 참여자다. 중급반 노인들은 이곳 경로당에서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 이상 박 사무장으로부터 교육받아 왔다. 가끔 생소한 곡이 나오면 불협화음을 내는 실수가 나오기도 하지만 경력에 걸맞게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다. 이 경로당에서는 매주 한 차례씩 기타를 처음 배우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초급반도 운영하고 있다. 초급반에는 현재 7명의 노인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기타 교실에서는 기타만 치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하면서 노래도 함께 부른다.

경로당 입구에는 ‘아침이 기다려지는 경로당-도도리 샘터’라는 이름의 간판이 눈에 띈다. 박 사무장은 “경로당 이름은공모를 통해 선정된 명칭”이라며 “경로당 한 회원이 ‘도도리샘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은 시도 있다”고 말했다.“(…) 새벽에 토끼가 물만 먹고 가는 샘/ (…) 목마른 나무꾼 목 축이고 젊어졌다는 샘/ 옛날 얘기 따라서 되돌아가는/도도리 샘터.”

으레 경로당 하면 떠올리는 음울하고 어두운 느낌의 공간이 아니라 매일 아침이면 찾고 싶어 저절로 발길이 옮겨지는그런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음악의 도돌이표가 의미하는 것처럼경로당을 통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도도리 샘터’라는 경쾌한 이름에 걸맞게경로당 내부는 전혀 칙칙하지 않고 밝고 환한 이미지다. 여기에 기타와합창 소리까지 어우러져 간판만 없으면 경로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이날 중급반은 1시간30분 동안 <토요일 밤> <내 나이가 어때서> <긴머리 소녀> <만남> <안동역에서> <새드 무비> <목로주점> <사랑해> 등 10여 곡이 넘는 가요와 팝송을 반복 연주하며 연습을 해나갔다.

7년 전 따가운 눈총에도 기타 교실 열어

“자자! 악보를 보면 이 곡은 메조 포르테(조금 세게)로 연주하라고 돼 있잖아요. 무조건 치지 말고 이런 부분을 잘 감안해서 연주해야 곡의 전체적 분위기와 맞지 않겠어요. OO씨는 좋은 기타를 가졌으면서 소리가 좀 작네요. 조금 더 힘 있게 연주해야죠. △△씨는 C하고 F 코드 잡는 것에 조금만 더신경 써주세요. 집에서 연습도 많이 하시고요.”

박 사무장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습이라고 해서 뭐하나 설렁설렁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개인별로 꼼꼼하게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교정해 준다. 전금순(77)씨는 이날 참석한 교습생 중 최고령자다. 전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기타를배운 지 4년째라고 했다. “취미생활로 이만한 것이 없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전 할머니는 젊은 시절 기타 근처에도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몇 년 전 ‘로망스’ 곡을 기타로 멋지게 연주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부럽더라고요.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생각을 그때 했어요. 그러다 경로당에서 기타를 가르친다는얘기를 듣고 시작하게 된 거예요.”

이날 참석자 중 “제일 어리다”고밝힌 정명애(64)씨도 우연한 기회에 경로당 기타반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아파트단지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디서기타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마음이 끌렸어요. 무작정 경로당 문을 열고 들어갔죠.”

유난히 흥이 많아 보이는 최영애(76)씨가 “박 사무장님에게 기타를배운 지 벌써 4년째”라며 “이 중에서내가 아마 선생님(박 사무장)을 제일 좋아할 거예요. 선생님은 고양시보물이에요”라고 말한다. 최씨 말대로 이 경로당이 확 바뀌게 된 것은 박 사무장의 역할이 가장컸다는 데 다들 이견이 없다.

박 사무장이 이 아파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파트가 막지어진 10년 전이다. 이사 오고 얼마 안 돼 박 사무장은 경로당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경로당의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밥상 하나 없이 노인들이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놓고먹고 있더라고요. 변변한 밥솥, 냉장고 하나 없었어요.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인생 말년인데 경로당마저 음침하고 환경이 안 좋으면 노인들이 어디 마음 둘 곳이 있겠어요. 얼마 뒤 내가 직접 경로당 운영을떠맡게 됐습니다. 꼭 필요한 가재도구도 사고 환경도 밝게바꾸면서 하나둘 경로당을 바꿔 나가게 된 겁니다. 그러다뭔가 노인들이 여기 와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7년 전 어르신 단 두 명으로 시작한 기타 교실은 나중에장구 교실로 이어졌다. “다 늙은 노인이 무슨 기타를 치겠느냐”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비아냥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하지만 박 사무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로당 프로그램을 하나둘 늘려가기 시작했다.“일반적으로 노인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무서워하잖아요.그동안 살아온 대로 여생을 보내다가 죽는 날만 기다리는거죠. 이 경로당에서 일하면서 노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현재 도도리 샘터 기타 연주단은 ‘시니어 앙상블’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다. 연주단은 지난해부터 고양시 관내 각종행사와 경로당, 노인복지관 같은 시설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틈만 나면 인근 시장과 공원 등에서 버스킹도 한다. 박 사무장은 “경로당이 주최하는 연주회는 아마 전국에서 우리빼고 없을 것”이라며 자랑한다. 그가 자랑거리로 내놓은 연주회는 지난해 11월 6일 ‘우방 작은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인근 근린공원에서 열렸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날 음악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200여 명이 넘는 주민이 경로당 어르신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음악회를 찾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시니어 앙상블’은 마을의 대표연주단으로 자리매김했다.

1-3세대가 어울리는 소통 공간으로 변신

‘도도리 샘터’는 한 달에 두 번씩 노인 치매 예방 차원으로 종이접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만든 작품을 경로당 한쪽에 전시해 놓았다.

‘도도리 샘터’는 한 달에 두 번씩 노인 치매 예방 차원으로 종이접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만든 작품을 경로당 한쪽에 전시해 놓았다.

이 경로당에는 다른 다양한 프로그램도 매주 요일별로 나눠진행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하고 악기 연주가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치매 예방에 효과적인 종이접기, 미술치료, 모바일 아트 등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경로당 한쪽 구석에는 어르신들이 색종이로 직접 접은 작품이 전시돼 있다.모바일 아트 프로그램은 휴대전화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작품활동이다. 박 사무장은 우수 작품 30점을 선별해 올해안에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도 세웠다.

또 경로당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1-3세대 간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어른들도 가보지 않는 경로당에 아이들이 자주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경로당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영어공부, 농사체험, 역사탐방, 전통문화 체험, 충효교육, 마술교실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을 경로당이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데는 박사무장을 포함해 경로당 어르신들의 재능 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로당 어르신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박 사무장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일들이었다고 한다. 경로당 기타 교실 단원이자 영어공부방선생님인 나정찬(66)씨의 얘기다. 나씨는 서울대 영문학과출신으로 교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처음에는 아파트단지 초등학생들에게 단순히 영어를가르쳤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에서도 영어를 지겹게 배우잖아요. 굳이 경로당에 와서까지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영어 공부가 아닌 재밌는 놀이를 통해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내용을 바꿨어요.”

박 사무장 역시 좁은 경로당 안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가르치는 것보다는 가급적 야외에서 아이들이 재밌게 활동하며 뭔가를 배울 수 있는 방식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오릉, 암사동 선사유적지, 제3 땅굴, 석촌동 백제고분 등의 역사탐방 프로그램이었다. 또 아파트 인근 농장에서 땅 40평을 빌려 아이와어르신이 함께 각종 채소 등을 기르는 농사체험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경로당에서 아이들에게 충효와 기본 예절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다.

경로당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이 같은 1-3세대 간의 소통 프로그램은 어린 자녀가 있는 아파트주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언젠가아파트에 사는 한 초등학생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경로당을찾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박 사무장에게 “밥 좀 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엄마가 외출하면서 “혹시 배가고프면 경로당에 가서 밥을 먹으라”고 해 찾아왔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말을 들은 박 사무장은 무척 흐뭇했다고 한다.주민들이 아이들을 믿고 맡길 만큼 경로당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도리 샘터 경로당을 취재하면서 놀란 점 중 하나는 3년전부터 경로당이 지역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경로당 측은 지난 1월 말 고등학생 7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행사를 열었다. 경로당 예산이 풍족하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돈으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박 사무장과 경로당 어르신들이 전통 방식으로 직접 담근 간장·된장·청국장을 주민들에게 판매한 수익금이재원으로 활용된 것이다. 경로당 한쪽에는 ‘청국장 제조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별도 공간이 있다. 박 사무장의 얘기를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파주 장단콩을 사서 경로당주방(청국장 제조실)에서 8시간을 푹 삶고 숙성시켜 된장을만들고 있어요. 또 메주를 주문 제작해 들여온 뒤 간장도 담그고 있고요. 청국장을 만들어 판 지는 벌써 4년째네요. 이번에는 원가가 120만원 정도 들었는데 지난해 10월 말부터 지금까지 판매한 대금이 대략 470만원이에요. 만들기만 하면금세 다 팔리고 없을 정도로 주부들에게 인기가 좋답니다.판매 수익금으로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또 경로당에서청국장 등을 만드는 할머니들에게 인건비도 1명당 20만원씩 드리고 있어요.”

경로당 하면 보통 기업이나 지자체,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데 반해 이곳 도도리 샘터 경로당은 정반대였다. 경로당이 주도적으로 수익사업을 벌여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물론 이를 경로당 인건비로도 활용하며 자생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박 사무장은 “노인들이 항상 받기만 하는 존재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경로당을 중심으로 각자 환경에맞게 프로그램을 잘 개발하면 얼마든지 노인과 주민 모두에게 행복하고 지역에 꼭 필요한 경로당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취재 말미에 박 사무장은 고양시 노인복지과 공무원들에대한 감사의 얘기를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경로당이 이만큼 활성화된 데는 시 공무원들이 함께 고민해 주고 또 필요할 때마다 잘 지원해 줬기 때문이에요. 청국장도 팔아주고 프로그램 아이디어도 주시고요. 공무원이 아니라 식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고마운 마음을꼭 표시하고 싶네요.”

90대 어르신도 경로당서 카톡 사용법 익혀

지난해 11월 6일 ‘도도리 샘터’ 기타 교습반 단원들이 중심이 된 ‘시니어 앙상블’ 연주단이 아파트 인근 근린공원에서 주민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었다. 200명이 넘는 주민이 관객으로 참여한 풍성한 마을잔치였다.

지난해 11월 6일 ‘도도리 샘터’ 기타 교습반 단원들이 중심이 된 ‘시니어 앙상블’ 연주단이 아파트 인근 근린공원에서 주민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었다. 200명이 넘는 주민이 관객으로 참여한 풍성한 마을잔치였다.

고양시 도도리 샘터 경로당은 한국의 경로당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경로당이갈 데 없는 뒷방 노인들이 모여 무기력하게 시간만 보내는장소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고 소통하면서 남은 인생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경로당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도도리 샘터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경로당의변신과 활성화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교육·건강·취미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경로당이 폐쇄적인공간이 아닌 지역주민에게도 열려있는 공간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최근들어 정부와 각 지자체, 대한노인회등이 적극적으로 경로당의 이런 변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경기도 광명시가 지난해부터 시작한 ‘소셜 경로당’ 사업은 디지털 시대에 소외된 노인을 위한프로그램이다. 이 사업은 ‘어르신 SNS 강사’를 양성해 이들이 각 지역 경로당 노인을 대상으로 스마트폰과 SNS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 광명시에서는 지난 6개월 동안 경로당교육을 통해 양성된 노인 SNS 강사 20여 명을 배출했다. 이들은 광명시 관내 경로당을 다니며 디지털기기 사용에 서툰어르신들에게 문자 보내는 법이나 카카오톡과 같은 채팅앱사용법을 가르쳤다. 광명시 하안아파트 경로당에서 만난 이승만(97) 할아버지는 “이 나이에 스마트폰과 SNS 사용법을배우게 될지는 몰랐다”며 “가족이나 지인과 소통하는 새로운 길이 생긴 것 같아 자신감도 생기고 행복한 기분”이라고했다. 최근 경로당이 이 같은 배움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울산시 남구 무거동 경로당에서는 매주 화·목요일에 ‘도란도란 어르신 한글학교’가 열린다. 이 경로당에서 한글을배우는 어르신 학생은 15명이 넘는다. 대부분 80세 이상이다. 평균 출석률도 90%가 넘을 정도로 배움의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열 명의 교사는 대부분 무거동에 사는 40~50대 주부들이다. 이들은 무료 봉사로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학년이 구분돼 있다.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성인문해교육이 교재다. 1학년은 기역(ㄱ), 니은(ㄴ)으로 시작해 받침 없는 글자를 배운다. 2학년이 되면 어르신들은 받침 있는 글자도 곧잘 쓴다. 짧은 문장으로 받아쓰기도 한다. 3학년은 잘읽고 잘 쓰는 학생들로 띄어쓰기나 문장부호를 익힌다. 이곳에서 최고령자인 주남례(95)씨는 연필을 꼭 쥐고 공책에 한자 한 자 정성스럽게 글자를 눌러쓴다. 워낙 고령인 탓에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교사의 입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하는데 여념이 없다. 지난해 7월부터 경로당에서 한글을 배웠다는 이기분(72)씨는 “동 주민센터 등에 가서 이름이나 주소를 쓸 줄 몰라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한글학교 덕분에 이제는 내가 직접 쓸 수 있게 돼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건강과 취미 활동을 결합한 경로당 프로그램을 운용하고있는 지역도 있다. 경북 안동시 관내 경로당이 대표적이다.안동시는 노인 인구 비율이 21%를 넘어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상태다. 시는 관내 모든 경로당에 한궁(韓弓)을 보급하고있다. 한궁은 우리나라의 전통 놀이인 투호와 전통 종목인궁도 그리고 서양의 양궁의 장점을 접목한 것이다. 과녁에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핀을 던져 고득점자가 승리하는 운동이다. 어르신들에게 잦은 치매나 중풍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울산 무거동이나 안동시 관내 경로당처럼 노인만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전형적인 경로당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몇년 전부터는 소위 ‘개방형 경로당’이 경로당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개방형 경로당이란 노인뿐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드나들면서 소통·문화 공간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울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초록 북카페(Green Book Cafe)’가대표적이다. 초록 북카페는 대한노인회와 JTI코리아가 공동으로 진행한 경로당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6년 7월에 만들어졌다. 원래 전통적인 경로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이용하는 경로당 1층은 도배와 장판 교체 작업을거쳐 한층 밝아진 분위기로 바뀌었다. 소파·식탁·의자·에어컨 등 집기와 시설을 새롭게 장만해 어르신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쉴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내부 리모델링 과정에서 경로당 어르신들의 의견을 청취해 이를 최대한 반영했다고 한다.

창고로 방치되던 경로당 2층은 북카페로 변신했다. 북카페에는 JTI코리아 측이 기증한 570여 권의 책을 포함해 2000권이 넘는 다양한 서적이 구비돼 있다. 또 커피와 차를 무료로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어르신은 물론이고 지역주민 누구라도 편하게 방문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꾸민 공간이다.

지자체마다 늘고 있는 ‘개방형 경로당’

경로당은 노인들의 위한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울산시 남구 무거동 경로당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한글학교가 열린다. 40~50대 주부들이 교사로 나서 무료봉사를 한다.

경로당은 노인들의 위한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울산시 남구 무거동 경로당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한글학교가 열린다. 40~50대 주부들이 교사로 나서 무료봉사를 한다.

 대한노인회 측은 “경로당이 노인들의 쉼터로서의 역할을 넘어 이제는 지역주민과의 세대 간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현재 서울에서 개방형 경로당이 가장 활성화된 지역은 강남구·동작구·중구 등이다. 이들 지역은 관내에 각각 15~20군데의 개방형 경로당을 운영하고 있다. 어르신을 위한 서예, 필라테스, 웃음치료, 공예 등다양한 여가·문화생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 천연비누·디퓨저 등 아로마 생활용품과 원예·수공예를 전문 강사에게 배워 생산하고 판매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어르신들은 지역주민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쳐주거나 어린이집,학교, 복지기관에서 보조강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방형 경로당의 남는 공간은 주민들에게 개방해 주민 모임방, 영화 상영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경로당의 변신을 ‘시니어 리스타트센터’(SRC) 개념으로 설명한다. 과거에는 경로당을 노인을보호하고 단순 지원하는 공간 정도로 인식했다. 하지만 노인의 사회참여 욕구가 증가하면서 경로당이 1차원적 복지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여가활동과 보건·문화·일자리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중심 공간으로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로당과는 다소 형태가 다르지만 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개념을 도입해 지역사회 단위로 노인이 여가와 문화·교육 프로그램을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3세대 노인 클럽’, 미국의 ‘시니어 센터’가 그것이다. 3세대 노인 클럽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1만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레크리에이션, 여행, 친교활동과 건강 프로그램은 물론 전문기술 습득 프로그램까지 제공된다. 프랑스노인의 80% 정도가 한 가지 이상 클럽활동에 참여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니어 센터는 미국 전역에 2만 개 가까이 설치돼 있는데 지역 특성에 따라 센터별로 다르게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다목적 센터’는 교육·운동·건강검진·교통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세대 간 센터’는 1-3세대가 함께봉사활동과 레크리에이션을 함으로써 세대 간의 간극을 좁히는 데 주안점을 뒀다. ‘특별 센터’는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한 가지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운영한다. 가령 다민족 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건강검진과 질병치료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운영하거나 저소득층노인이 많은 지역은 정기적으로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만 운영하는 식이다.

향후 중장기적으로 경로당이 고령자들의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도나오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적극적인 지역사회 활동이 가능한 형태로 경로당이 한발 더 진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를 통해 노인의 일자리·소득 문제까지 동시에 해결하자는 주장이다. 국회 교육문화관광체육위원회 김병욱 의원은 “정부와 지자체, 시민사회단체가 우리의 경로당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까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할 시점”이라며 “시니어의 문화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프로그램 기획, 재정적뒷받침 등 종합적이고 중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로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1위는 노래 교실, 2위는 무용 강습”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국회 교육문화관광체육위원회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경로당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문화·여가프로그램은 노래 교실인 것으로 조사됐다. 2위는 에어로빅과 사교댄스등을 배울 수 있는 무용 강습으로 수도권에서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연구원이 ‘시니어 문화 여가 수요조사’를 분석한 결과 전국의 경로당에서 운영하는 문화·여가 프로그램(중복응답)은 노래 교실(21.5%),무용 강습(14.4%), 전통문화(12.8%), 학습(11%), 취미 활동(9.8%) 순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로당 문화·여가 프로그램 이용자들의 호응도(매우 높음+높음)는 노래 교실 91.8%, 무용 강습 81.5%, 여행탐방 76.2%, 전통문화 70.8%,요리 교실 63.2%, 문화관람 61.1% 순으로 높았다. 수도권에서는 에어로빅과 사교댄스 등을 배울 수 있는 무용 강습이, 호남권에서는 노래교실이, 동남권에서는 여행·탐방이, 충청·세종권에서는 요리 교실이 상대적으로 호응이 높았다. 신설 또는 확대가 필요한 문화·여가 프로그램(중복응답)은 노래 교실 15.1.%, 무용 강습 12.4%, 문화관람 10.3%, 전통문화 8.9%, 언어 및 컴퓨터 등 학습 8.3%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직접 몸을 움직이며 체험할 수 있는 문화·여가 활동에 대한 호응도가 높고 더 확대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경로당은 언제부터 생겼나?

“고려시대 사랑방에서 유래…1997년부터 경로당 설치 의무화”

경로당은 고려시대 사랑방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 학설이다. 부잣집들은 바깥채 큰 방인 사랑방을 마을 사람들에게 개방했다.사랑방에서는 주로 고령자들이 모여 문중일부터 농사와 신변잡사에관한 다양한 이야기와 생활 정보를 교환했다. 사랑방은 일제 강점기토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으나 유용한 기능 때문에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정자 또는 무허가 판잣집 형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경제 개발이 본격화하고 지역사회에서 소통의 필요성이 급증하면서 현대적 형태의 경로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도시구획정리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정부가 경로당에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1997년 주택개발법이 개정되면서 리(里)나 동(洞) 단위로 최소 1개 이상의 경로당 설치가 의무화됨으로써 그 수도 급증했다.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2017년 노인복지시설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의 경로당 수는 6만5044개로 5년 전에 비해 2602개(4.2%)가 증가하는 등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노인복지관이나 노인교실 등과 달리 경로당은 노인 스스로가 운영 주체이자 이용자가 되기때문에 지역별로 이용과 활용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글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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