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길쌈을 반려삼아 한평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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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명주 길쌈에 서둘러 조바심하거나 초조함은 금물이다. 그만큼 성격이 찬찬해야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물건이다. 누에고치에 서려있는 실올이란 적은 바람기에도 간데없이 날려버리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것. 실마리를 찾는다는 말은 고치실을 다뤄보면 절로실감이 난다.
지난 3월 중요 무형문화재87호「명주짜기」로 지정된 경북 성주두리실의 조옥이할머니(68세·용암면본리2동)는 평생 길쌈 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고 했다. 겨우내 무명 짜고, 초여름과 가을엔 명주요, 그 사이 삼복에 삼베 일을 하다보면 한해가 간다.
요즘과 달라서 농촌이지만 부녀자는 일체 들일을 나가지 못하는게 경상도 반촌의 관습이었다. 그러니 집 안에서 매달릴 일이라곤 길쌈밖에 없었다.『시세 좋을 적에 멩지 두자머리로 땅 한평씩 샀지요』그러니까 명주 1필을 팔아서 논20평을 샀다는 계산이다. 조할머니는혼자 순전히 베짜서살림하는 처지였지만 논 6마지기를 사들였고 밭도 4백평이나보탰다. 농토는 시동생에게 맡겨둔채 새로 산 땅조차 어디에 붙어 있는지 한동안 모르고 살았다.『우리 셍님(강석경·78세)이 멩지 더 잘 짰지요. 6·25때 화재 만난것을 멩지 팔아 곧 집짓고 얘들 공부 다 시킸지….』

<어려서부터 부지런>
남자가 곡식을 거둬들이지 못하면 끼니가 궁셴고 주부가 길쌈 못하면 온식구가 벌거벗을수밖에 없던 자급자족의 생산경제가 그대로 유지돼온 곳이다. 일제 때도 그러했고 해방후에도 얼맛동안은 그런 체제가 지속되었다. 정작 한국의 농촌경제가 이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 전일까.
한국의 농가치고 길쌈 않는곳이 없지만 명주하면 단연평안도요, 삼베는 함경도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리고 무명과모시는 삼남에 걸치는데 산지를 끼고 있는 지방에선 으례명주가성행됐다. 비단과 사치가 상통하는데서 빚어지는 속성에 기인하리라.
기록상으로는 변진사람들과 마한사람들이 일찍부터 누에칠줄알고 면주(명주)를 했다. 더구나 한대 문화와의 접촉이 갖았던 부여와 고구려 지역에서비단 다루는 기술이 한층 확대되고향상됐음은 불문가지다.
명주와 모시가 동시에 나는지역에서는 교직이 또한 발달됐다. 명주실과 모시올을 함께이용한 춘추용 고급옷감이다. 19세기 문헌에 특산품으로 열거한 예로는 공주의 춘주, 장성의 춘포, 강률병영의 춘사등이 그것이다.
두리실은 성주 남쪽 낙동강의 물굽이 가까운 농촌.단종때 이미 안동권씨가 터를 잡은집성촌이다.
지금은 산 계곡을 따라 궁벽진 편이지만 낙동강의 수운이 활발했던 조선시대에는 성주의 길목이던 동안진이 지척이다.
본시 성주라는 땅이 올망졸망하게 산으로 뒤덮인 편이어서농토가 넉넉한 고장이 아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좋아하고 여공이 뛰어난다고 했다(동국여지승람). 여기서 여공이란 말할것도 없이 여성들의 길쌈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이곳 여성들의 민요에는 명주를 곱게곱게 다듬어 나라님께 진상하고자 소망하는 귀절도 있다. 진상품이라면 농촌여성으로 그 이상가는 최고의 영예가 더 있을까.
조할머니는 근동의 문산리태생.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길쌈이었다. 친정 어머니도 눈밝고 손끝이 야무져서 무명을 많이했고 일손이 모자라 목화따는 일은 어린 딸의차지였다.
2천평이나 되는 목화밭에서한쪽 머리부터 따고나면 다른한쪽 머리의 목화송이가 하얗게 피어나서 진종일 쉴 짬이없었다. 매일같이 끝이 없는 일이었다. 짜증나고 부아가 치밀지만 삭이며 살아가는 인간사를 거기서 터득했다.

<수공만큼 소득안돼>
18세에 시집 와서 아기낳자남편이 훌쩍 고향을 떠났다. 일제하의 2차대전중이다. 얼마 뒤 만주에서 사진한장 보내오곤 다시 소식이 끊겼다. 멀쩡하게 청상이 된 시름을 길쌈으로 달랠수밖에 없었다. 이제나저제나로 근50년이 지났다.
일제 말기엔 그나마 길쌈마저 못하게했다. 누에씨를 공급해주고는 고치를 수확하면 몽땅공판장에 내다가 공출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목화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길쌈은 밤으로 몰래 했다. 호롱불 밑에서 밤새워 가슴 죄며 했다. 사흘이면 족한 일을며칠씩 두고 밤을 지새웠다.
두리실에서만도 길쌈 많이 할때는 40여호나 했다. 한집에서봄누에 1장·가을누에 2장을풀면 모두 명주 l2필이 나므로 이 마을에서 줄잡아도 연3백∼4백필이 직조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밖에 삼밭(마전)1천평이면 삼베 20필(20자1필)이 생산되고 무명은 수도없이 많이 했다.
물론 총 직조량은 도저히 집계가 안된다. 어느새 옛 얘기가 되어 군청에서도 감을 잡지못했고 향시의 포목전 사람중에도 그런 증언을 해줄만한 고노를 찾을 길이 없었다.
명주는 보통이라야 보름새를친다. 이르기는 16새 이상 20새도 했다지만 도리어 12∼l3새가 생길 형평이다. 이제 옛얘기처럼 됐다. 그렇게 곱게 짜려면 고치실을 20∼10올까지 줄여 실 자체를 가늘게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수공만큼 소득이 미치지 못한다.
상품 명주를 일러 관서분주라 꼽는 말인즉 1필이 푼주하나에 담길만한 부피라 풀이되지만, 정작 몇새에 해당될는지 가늠이 안된다. 신라시대의조하금이니 어우금이니 하는 것도 결국 명주와 같은 비단일것인뎨 그것들이 얼마나 곱게직조됐으리라고는 짐작이 갈만한 근거가없다.
15새의 명주를 짜려면 보통고치실 30을 이상을 합사해서날실과 씨실로 삼는다. 가는명주일수록 고치실을 더 적게 모으고 새수가 적을수록 상대적으로 실을 굵게 쓰게 마련이다. 한새란 베맬 때 명주실 80가닥을 일컫는 계산 단위이므로 15새면 바디구멍 6백개에1천2백가닥의 날실을 꿰게된다.
누에고치의 숫자로 환산하면3만6천개.

<실썰기 가장어려워>
1필에 필요한 고치는 4·5kg. 거기서 10타래(타래당 약5만8천m의 실을 뽑아 그중 42%로는 날을 매고 58%는 꾸리에 감아 씨실로 이용한다.
뭐니뭐니 해도 실써는 일이가장 어려운 솜씨라는 귀띔이다. 실썬다는 말은 뜨거운 물속의고치에서 실올을 일제히 뽑아내 자새를 거쳐 푼사를 물레(왕쳉이)에 감는 작업이다.
고치를 따자마자 사용하면 실썰 때 솥의 물이 쉬 탁해져버려 곤란하다. 반대로 10여일씩묵혀두자니 번데기가 나비 되어 구멍을 뚫을까 조심스러운노릇이다. 그래서 고치는 3∼4일바람씌었다가 한목에 실을 뽑아놓게 되므로 주부로서는 항시 조급하게 마련이다. 실써는 물은 자주 갈아줘야지, 워낙 염색이 잘되는 명주실이어서 물이 탁하면 누렇게 변색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몇십올의 실올이 끊기지 않게 고르게 뽑아내는 것도 오랜 숙련이다.
두손이 다 바쁨은 물론이고잠시도 눈팔 겨를이 없거니와물의 온도에까지 민감해야 한다.물이 너무 끓어도 실올이까실까실해지고 덜 데워져도 실이 서걱거려서 좋은 명주가, 짜이지 않는 것이다.
조할머니는 시집 오자 베짜고, 얼마 안가서 베매는 일을 했지만 실써는 일을 맡아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걸렸다고 토로했다. 시할머니가 하도 일을잘했던 까닭에 어려운 고비가생기면 분업화하다시피 처리해주셨고, 그런 수련과정일수록 대가족제도가 편리했다.
길쌈은 언뜻 개개인의 솜씨에 국한된 것 같으나 작업을해가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분업과 협동이 필요하고, 노련한할머니의 도움말 한마디가 한결 소중한, 구석구석 잔손질이많은 작업이다. 성급하게 서두른다고 되는게 아니고 속상하다고 덤벙덤벙 해치울 일이 아니다.

<길쌈보존회 조직>
날 끊어진줄 모르고 얼지운채 짜는 것은 반드시 풋나기만 저지르는 서투름이 아니다.
또 바람기 있는데서 날을 잘못 매어 씨실이 삐딱하게 짜이기 시작하면 바로잡기가 여간 거북한게 아니다.
숙련을 필요로 하는 일일수록 다 그러하지만 한동안 일을 쉬면 손끝이 무디어진다.
짜는 일이야 누구나 다 한다지만 1등가는 솜씨로 명성을 얻기란 타고난 재주이어야하고 수직이 아주 쇠퇴해버린 현실에서는 그나마 솜씨의 보존조차 큰 문제거리다.
한동안 이름났던 상주성창에서도 요즘에는 기계직 위주로바뀌였다. 두리실의 경우 권씨집안과 강석경·조옥이 두 할머니 밖에는 베틀마저 남겨두지 않았다. 한때 대대적으로 권장됐던 뽕밭이 십수년전 서리맞은 여독으로 농촌에서 뽕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제는 경제성이 문제되는게 아니라 그런 고역스런 일에매달리려는 젊은이들이 없다.
두리실에서는 꾸준히 명맥을이어온 긍지로 이번 지정과 더불어「두리실 길쌈보존회」(회장 권병운)를 조직했다. 마을유지는 물론, 이 고장 출신의 학자와 사업가등이 평의회를 구성해 뒷받침하고 마을사람들로회원 60여명을 규합했다. 대단한 의욕이다. 보존회의 취지는 전국의 수직이 다 사라진다해도 두리실에 오면 명주·무명·삼베를 옛모습 그대로 보여줄수 있는 길쌈마을 만들기라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명성은물론 교육과 관광의 2중효과까지 얻게된다.
마을의 여건으로는 희망적이고 고무적이다. 원료의 생산으로부터 직조와 염색까지 해내고그밖의 전통적인 허리띠와포대기끈 등을 부업으로 재현하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쨍하게 햇별들게 되리라.다만 문제는 주민들 자신의 의식과 자활책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다음이 주변의 지원여부다.
글 이 종 석
(중앙일보출판기획위원 문화재전문위원)
사진 박 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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