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프랑스 새 노동법 누가 최대 피해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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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학생 시위사태를 부른 최초고용계약(CPE)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 거리로 나선 대학생이나 현장 노동자를 떠올리기 쉽겠지만 직격탄을 맞은 집단은 26세 이상의 청년 실업자들이다.

예정대로 다음달부터 CPE가 시행되면 26세 미만의 직원을 채용한 기업주는 처음 2년 동안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지만, 26세 이상의 신규 채용자에 대해선 현행 프랑스 노동법에 따라 정년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니 26세 이상의 한물간 취업재수생의 취업 가능성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18일 저녁 수만 명의 시위대가 집결한 파리 나시옹 광장에서 이런 딱한 처지의 프랑스 청년을 만났다. 그는 파리 교외 믈룅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하는 늦깎이 학생이다. 지금 나이가 24세로 26세에 학교를 마치게 된다. 그는 "가뜩이나 좁은 취업의 문이 최초고용계약 제도 때문에 거의 닫힐 지경이 됐다"고 흥분하며 "때로는 폭력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시위대의 폭력 사용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 청년에 비하면 26세 이전에 취업시장에 나올 대학생들은 그래도 임시직 취업 기회라도 있으니 나은 편이다. 사실 이미 취업해 정년을 보장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제도로 볼 피해가 별로 없다. 그래서 과거 노동법 반대시위 때와는 달리 이번 시위는 학생들이 주도하고 노조는 겨우 발만 걸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프랑스 시위사태를 읽는 열쇠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데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정치적 '잔수'가 작용한 측면이 크다. 지난해 6월 총리에 임명된 그는 취임 일성으로 10%를 넘나드는 실업률을 낮추겠다고 선언했으며 일자리 창출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선정했다.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의 유력 주자인 그는 실업 해소 정책을 성공시켜 능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하반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10%를 넘던 실업률이 불과 6개월 만에 9%대 중반으로 떨어졌다. 그 기간에 새로 생긴 일자리의 대부분이 임시직이었지만 수치상으로 실업률이 떨어지자 빌팽 총리는 크게 고무돼 CPE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빌팽의 가장 큰 실수는 '평생 고용의 철밥통'을 보장하는 기존 시스템은 개혁하지 않고 만만한 젊은이들만 제물로 삼았다는 점이다. 어렵더라도 용기있게 시스템 개혁을 시도했더라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은 더욱 선명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경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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