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면_권영민의 논술이야기_1화4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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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제시문 이해가 어렵다. 제시문을 무시한 채 논술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아예 그대로 베껴 쓰기도 한다. 권부장과 중앙샘은 제이가 작성한 논술문과 제시문을 토대로 뭐가 잘못됐는지 고쳐 주기로 했다.

논제 : 다음 제시문을 참고하여 '갈등의 의의'에 대해 서술하시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향촌에 기반을 둔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림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과 대결할 때는 단결하였으나 훈구 세력이 무너진 뒤에는 자체 분열하여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붕당을 형성하였고, 붕당 간에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졌다. 소위 당쟁(黨爭)이라고 불리는 붕당 간의 권력 투쟁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와 같은 정치적 혼란과 폐해를 낳았다.

(중략)

그러나 조선시대의 붕당 경쟁을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 본래 붕당이란 성리학에서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덕을 닦은 연후에 사람을 다스리라고 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공도(公道)를 실현하려는 정치집단이었다. 왕권의 전횡을 막고 신진 세력의 등용과 정치권력의 상호 견제 기능을 담당하였던 붕당정치는, 한정된 관직을 놓고 경쟁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의미 있는 정치 형태였다. 그래서 윤휴(尹?)는 "붕당은 족히 천하를 어지럽게 하지만, 붕당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면 천하를 망하게 하는데 이른다"고 하였다. 양반계급이 추구하는 권력, 지위, 명예 등 한정된 가치의 재분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해결 방법으로 붕당정치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 김상봉, '학벌사회' 중에서

<제이의 논술문>

① 조선 시대 붕당들 사이에는 한정된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 이는 정치적 혼란과 폐해를 야기했다. 그러나 붕당 정치는 왕권의 전횡을 막고 신진 세력의 등용과 정치권력의 상호 견제 기능을 수행했다. 따라서 붕당 정치는 제한된 가치를 놓고 생겨난 양반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는 갈등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경우에 따라서 심각한 사회적 폐단을 가져오기도 하는 갈등은 ②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③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갈등 중에서 폭력과 차별을 수반하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갈등은 자제해야 한다.

권부장: 제이의 논술문은 잘못된 점이 있구나. 하나는 제시문과 너무 가까이 있고, 하나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탈이구나.

제이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잘 이해가 안 돼요.

중앙샘 : 내가 얘기해 주마. 먼저 ①의 부분을 보렴. 제시문을 그대로 쓰고 있지.

제이 : 그건 '요약'한 건데요.

중앙샘 : 제시문을 베껴 쓰는 것은 요약이라고 할 수 없지. 단순히 글자 수를 줄인 거잖아. 네가 제시문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니?

권부장: 신문 기사로 얘기하면 기관이나 관청, 또는 누군가 보낸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내는 것과 같단다. 기자가 객관적인 관점이나 사실 확인, 심층적인 추가 취재 없이 기사를 쓴다면 독자들이 잘못된 내용에 그대로 노출될 수도 있겠지?

제이 :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중앙샘 : 너의 생각과 너의 언어로 써야지. ①을 한번 보자. 붕당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해서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균형과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데 붕당제는 상호 견제와 인재 등용을 통해 정치의 균형과 발전을 꾀하였다"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제이 : 신기하군요. 제시문을 베끼지도 않았고, 동문서답을 하지도 않았네요.

권부장 : ②처럼 모호한 단어는 좋지 않단다. 구체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못해. ③은 네가 알다시피 동문서답이지. 이건 갈등의 의의 보다는 갈등의 주의사항인 것 같구나. 결과적으로 핵심 주제인 의의는 빠뜨리고 말았어.

제이 : 저는 갈등의 양면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중앙샘 : 일단 논제에서 의의를 요구하면 의의를 쓰고, 양면성을 요구하면 양면성에 대해 써야 한단다. 갈등의 의의 역시 긍정적이라는 평가 외에 더 나아가지 못했어. 왜 긍정적인지 독자를 납득시켜야지. 정치란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이므로 갈등을 통해 타협에 이를 수 있다면 이는 갈등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

제이 : 그렇군요. 갈등은 타협의 필수조건이랄 수 있겠네요.

권부장 : 갈등이 필수조건은 아니지. 대화가 필수조건이야. TV토론이나 뉴스를 봐라. 대화가 없으니 정치권에서도 막말이 오가고 몸싸움으로 일관하고 있지 않니?

제이: 아, 맞아요.

중앙샘 : 제이는 논술문을 쓰기 전에 제시문을 좀 더 꼼꼼히 읽는게 좋겠다. 두 번, 세 번 읽다보면 제시문에 대한 접근 방향이 잡힐 게다. 지금 너에게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구나.

제이 : 예. 선생님 말씀대로 우선 많이 읽고 제시문에 대한 훈련을 집중적으로 할게요.

<제이의 일기>

제시문과 연결해서 논술문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내가 너무 쓰는 데 급급하다 보니, 제시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은 논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나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도 너무 내 이야기만 하려 하지 말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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